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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다시 태어남과 소명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1.
다시 태어남과 소명

다시 태어남과 소명

 

 

전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이 아닌 곳에서 평범한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짐을 싸서 습지로 내려왔습니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전갈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전갈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난 다른 전갈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아.”라고 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결국 개구리들도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이 개구리인양 그들과 평화롭게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중 개울을 건너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그의 절친 친구 개구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전갈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등에 태우고 좀 이 개울을 건네줘.”

 

그러자 친구 개구리는 그가 개구리처럼 살기는 하지만 개울을 건널 수 없는 자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독침으로 나를 찔러서 죽일 거잖아.”

 

전갈은 말했습니다.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물속에 빠져서 죽잖아.”

 

그렇게 하여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갈은 개구리 등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하는 전갈이고, 아무리 원해도 개구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결국 전갈은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개구리는 개구리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랬듯이 올챙이 시절을 거쳐 땅으로 올라와 벌레를 잡아먹으며 삽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전갈과 같은 독침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전갈이 아무리 개구리가 되고 싶어도 그 독침을 없앨 수도 없고, 또 개구리처럼 수영을 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에게서 그렇게 태어났다면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본질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갈이 개구리가 되는 유일한 길은 개구리 부모로부터 개구리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얼마든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니코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새로 태어남, 즉 세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사람은 양과 염소로 나뉩니다. 즉 그 사람의 본질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 이전에 염소라면 양으로 빨리 우리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염소에서 양이 되는 유일한 길은 다시 태어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새로 태어났다는 보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요르단 강에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인간구원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에 합당한 소명 또한 부여받는 것입니다. 개구리로 태어났다면 개구리처럼 살아야하고, 전갈로 태어났다면 전갈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그에 합당한 소명대로 살아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로서의 소명은 인간구원사업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생소경의 눈을 만들어줍니다. 창조주로서 흙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실로암은, 그런데,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파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직무가 주어지지 않은 채 파견 받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소명이 주어져있고 그것을 성취하라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구원소명대로 물과 성령으로서 새로 태어나 파견되셨듯이, 우리 각자도 그 구원소명에 한 몫을 차지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소명은 우리의 소명과 구분되는 유일한 소명을 지니십니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한계가 없는 보편적 소명을 지니고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제한된 소명을 수행합니다.

 

사실 모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셔야 합니다. 사람이셔야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실 수 있고, 하느님이셔야 그 한 번의 희생제물이 영원한 효과를 지니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향력을 미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소명은 그 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증명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맡겨주시고 당신이 성취하는 그 일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증명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개살구가 열릴 수 없고, 가시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릴 수 없습니다. 각자 성취하는 일들이 바로 누구로부터 나왔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왔으니 그 분께서 맡기신 일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 그 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할 때야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인간적 소명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그 분의 인간적 소명에 참여하지만 그 분이 동시에 하느님이시기에 그 분의 영원성에까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분께서 말씀과 성체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매일 새로 태어나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행위는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에 본질을 변화시키면 저절로 그 본질대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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