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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묵상글 모음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처럼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27.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처럼

 

 

문둥이 성자로 불리는 다미안 신부는 1840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습니다.

1860년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하여 다미안이란 수도명을 받고 1864년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865년 하와이 군도에 나병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환자들을 몰로이카 섬에 격리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으로 옮겨진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몰로이카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2년간 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이 숨을 거두면 그는 살이 짓뭉개진 육신을 앞에 놓고 기도하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다미안 신부는 목욕을 하려고 물을 데우다가 실수로 뜨거운 물을 발등에 쏟았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끓는 물에 데었는데 아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저들과 같이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저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들도 알 것입니다. 제가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는 그 전까지 강론 때,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이라고 시작했지만, 이젠 자랑스럽게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문둥병자 형제들이여...”

 

하느님은 ‘영(靈)’이신 분이라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분과 함께 있다고 믿으려 해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또한 눈에 보이지 않기에 쉽게 잊고 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세상 어떤 종교에서도 신이 직접 사람이 되고 또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목숨까지 내어주고 게다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부활하여 인간에게 나타나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기까지 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 트리를 보십시오. 생명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먹지 못하여 잃게 된 영원한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이 오늘 나셨습니다.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다미아노 성인이 모든 이들에게 버려졌다고 절망하던 이들에게 자신도 그들과 같아지며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하느님도 사람이 되시어 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시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주신 날이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느끼는 이 행복이 쉽게 깨어질 수 있음을 경각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기쁨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어제 봉성체를 하는데 저는 큰 잘못을 했습니다.

봉성체를 할 때는 성체를 이동식 성합에 담고 그것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축 늘어져 배까지 내려옵니다.

저는 마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기분으로 환자분들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바쁜 성탄 때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마련한 작은 성탄 선물과 함께 성체를 전해주는 기쁨에 추위도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 앞에서 성합을 꺼내다가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성합 뚜껑이 열리면서 성체도 방에 나뒹굴었습니다.

수녀님이 몸을 굽혀 제 다리 밑에 떨어진 성체를 다시 주워 담고 있었지만 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떨어뜨리게 된 것은 제가 성합을 보지 않고 손 감각으로만 꺼내고 있었으며 딴 생각을 하면서 눈은 그 환자분이 예전에 타서 벽에 걸어놓은 표창장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순식간에 자책감과 우울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파울로 코엘료가 지은 연금술사에 나오는 한 예화가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이 참 행복의 길을 찾고 싶어서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기도하고 그만큼 재산도 많은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그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그 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모습의 궁궐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현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온 수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현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예, 저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의 집을 좀 구경해 보십시오. 집 안에는 세계의 귀한 예술품들이 모아져 있고 정원은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식물들과 꽃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두 방울의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드릴 테니 제 집을 구경하시면서 이 기름이 든 숟가락을 들고 다니십시오. 만약 집을 다 구경한 뒤에도 숟가락에 기름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때서야 행복의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다른 손님들을 만나야 하니 그 동안 집을 다 돌아보며 구경하도록 하십시오.”

 

그 사람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들고 집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예술품들과 볼거리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어느 순간에 숟가락에 있던 기름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걱정에 싸여 예술품이 예술품으로 보이지 않고 궁궐의 화려함도 정원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후에 집을 다 둘러본 후 현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집 구경을 즐겁게 하셨습니까?”

“아니요, 기름이 흘러내려, 그 걱정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도 즐겁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릴 테니 이번엔 잘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기뻐서 이번엔 숟가락에서 정신을 떼지 않으면서도 주위의 것들을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집을 다 돈 후에도 숟가락에는 기름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현자는 손님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행복의 방법을 말씀드리지요. 행복의 방법은, 손님께서 하신 것처럼, 숟가락의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고 주위의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기술입니다.”

 

저는 행복을 원하기는 하지만 제가 모시고 다니던 예수님을 잊고 다른 것을 쳐다보다가 그 분을 땅에 떨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를 잊어서 그 분을 떨어뜨리고 그 행복을 잃고 만 것입니다.

하와도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고 뱀을 바라보았다가 첫 죄를 짓게 되고, 아담도 하느님이 아닌 하와를 바라봄으로써 죄를 짓고 행복을 잃고 맙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저처럼 저희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부주의하게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행복도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이 없다면 그 성탄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지 않으면 우리 또한 아무 기쁨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도록 말구유와 마구간을 잘 준비하였다면, 이제부터는 그 새로 태어난 예수님을 끝까지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것이 그 기쁨을 유지하는 관건입니다.

 

성모님은 단 한 순간도 당신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으실 수 없는 분이셨고, 그래서 그 분 안에 하느님이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그래야 그 기쁨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성모찬송을 함께 소리 높여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수원교구 오산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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