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베로이아 중심지에 건립된 사도 바오로 설교 기념터의 모자이크 벽화
[화학에게 길을 묻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되기 황영애 에스텔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을 섞이게 하는 물질을 실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과 기름이 섞이게 할 뿐 아니라 물과 작용하여 기름에 찌든 때를 말끔히 없애주기까지 합니다.
비누나 세제가 바로 그것인데, 이런 물질을 계면활성제(界面活性劑)라 부르지요. 크림이나 로션, 파운데이션, 마스카라 등에도 계면활성제가 포함되어 있어 고체 입자를 물에 균일하게 분산시켜 줍니다.
계면활성제는 양쪽성 물질이다
계면활성제의 역할을 간단히 설명하면, 물 또는 기름이 자기들끼리 뭉치려는 힘, 곧 표면장력(表面張力)을 작게 해주어 두 물질이 서로 섞이게 합니다.
그 물질의 분자에는 물을 좋아하는 친수기(親水基, hydrophilic group)와 기름을 좋아하는 친유기(親油基, lipophilic group)가 양쪽 끝에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는 작용기들의 존재로 물과 기름 경계면의 성질을 변화시켜 섞일 수 있게 해주는 계면활성제는 일종의 양쪽성 물질입니다.
계면활성제의 융통성
물속에 기름이 있을 때는, 계면활성제 분자들이 바깥에 있는 물 쪽으로는 친수기가, 안에 있는 기름 쪽으로는 친유기가 향하도록 자리하며 기름을 둘러쌉니다.
그러나 기름 속에 물방울이 있는 경우에는 반대로 친유기가 바깥을 향하고 친수기가 안쪽을 향하도록 자리 잡습니다. 물쪽으로는 친수기가, 기름 쪽으로는 친유기가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어 섞이지 않는 두 액체 표면의 장력을 약화시켜 섞이게 하는 것이지요.
계면활성제는 자기가 가진 양쪽성을 이용하여, 옷에 묻은 기름때를 물속에서 둘러싼 다음 물과 함께 빠져나와 옷을 깨끗하게 세탁합니다. 다시 말하면, 계면활성제는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방향을 바꾸어 기름과 물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며 오염 물질까지 없애주고 있습니다.
전교의 사도 바오로
이 물질을 보면서, 원죄로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존재 의미를 회복시키려고 예수님과 죄에 찌든 인간 사이에서 복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연상되지는 않는지요?
넓게는 복음의 불모지인 낯선 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일 수도 있겠고, 좁게는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전교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에게 신앙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전교의 사도'로 알려진 바오로를 본받으려고 그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통 유다인이며 로마 시민권자인 동시에 그리스 문화에도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성뿐 아니라 열성까지 갖춘 덕분에 그리스도교를 빠른 속도로 전파시켜 세계적인 종교가 되도록 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기에 '전교의 사도'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오로 사도까지도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이라 했으니 선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세계를 이어준 바오로 사도
바오로 사도의 인물과 사상, 그리고 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소개한 책, "바오로 스케치"는 바오로 사도가 분석력이나 일을 처리하는 기획력이 탁월했기에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가능했다고 전합니다.
유다인들이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도 분석력이 필요했고, 그리스인들이 자연현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분석력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의 진리든, 자연의 진리든, 이를 이해하려면 하나하나 따지고 분석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바오로 사도는 이 모두를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분석력과 융통성
분석력은 바로 융통성과도 통하는데,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던 모습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환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니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시는 계시를 받았습니다(사도 10,9-16 참조). 그럼에도 그는 안티오키아를 방문했을 때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이민족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자신도 유다인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민족에게는 유다인처럼 살기를 주장하느냐며 반박하였습니다. 그는 고지식하게 율법을 고수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방인들에게는 좀 더 폭넓은 자유를 허용한 것입니다(갈라 2,11-14 참조).
주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다시 말하면 바오로 사도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대로, 할례 받지 않은 다른 민족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각각 다른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유다인 교우 형제들에게는, 그들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의 계약에 연결된다고 보았기에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받는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고 보았으므로 옛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개종한 신자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율법만 지킨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되기
또한 코린토 신자들로부터는 재정적 지원받기를 거절했지만, 갈라티아 신자들로부터는 이를 기꺼이 받았습니다. 코린토 공동체는 부자와 빈자의 갈등과 격차가 심해서 부유한 자들을 나무라는 입장에 있던 그였기에 부자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경제적 지원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상황에 따라 융통성과 다양성으로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그리고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라고 한 말씀에서 보듯이, 그는 전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면서도, 유다인 동포들이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동포요 예수님의 동포인 유다인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과 유다인들에게 그들의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이 되어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듯이, 저도 냉담하고 있거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를 버리고 계면활성제의 모습으로 선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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