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의 비오 신부 시복과 시성
오상의 비오 신부 시복
[바티칸시티〓CNS]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발과 손에서 피를 흘린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푸친 수도회의 비오 다 피에트레시나 신부가 5월 2일 시복된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교회인사 중 한 사람이었던 비오 신부는 1887년 이탈리아 아드리해 연안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카푸친 수도회에 들어갔다.
1910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1918년초부터 예수처럼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은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런 특별한 현상으로 인해 비오 신부는 교황청의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 됐고 교황청은 특히 30년대와 40년대에는 그의 사제직무의 대부분을 정지시키기도 했다. 비오 신부 역시 자신의 이상한 현상에 대해 몹시 거북해 하면서 나는 기도하는 수사이고 싶을 뿐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소식을 들은 많은 신자들이 그를 찾았고 그는 병원에서 일하며 하루 10∼12시간씩 고해성사를 주기도 했다. 이런 그를 가리켜 이탈리아의 한 신부는 행동이 아닌 열정을 지닌 성인이라고 말했다.
시복식을 주재하게 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비오 신부와의 개인적인 사연을 갖고 있다. 교황은 1947년 자신의 젊은 시절 비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기도 했으며 1962년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 시절에는 후두암 진단을 받은 친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비오 신부에게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 이 편지를 쓴 11일 뒤 에 그 친구의 암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비오 신부의 시복식에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자 로마 시당국과 바티칸 측은 시복식 날 성 베드로 광장의 입장객을 15만명으로 제한하고 20만명 정도로 예상되는 나머지 순례객들을 위해서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입구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 시복식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평화신문, 1999년 4월 25일]
교황청 후안 디에고 복자 등 9위 시성
이에 따르면 교황은 복자 후안 디에고의 시성식을 오는 7월30일 멕시코시티에서 거행하며 다음날에는 과테말라에서 복자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바탄쿠르의 시성식을 주재한다. 이에 앞서 교황은 7월23일부터 27일까지 세계 청소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캐나다를 방문한다.
교황은 또 오상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복자 파드레 비오의 시성식을 6월16일에 오푸스 데이의 창시자 복자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시성식을 10월6일에 각각 거행한다.
멕시코 원주민 농부로서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을 목격한 후안 디에고는 그 동안 실제 인물이었는지의 여부가 논란이 돼 왔으나 교황청 관계자들은 그가 1474년 경에 태어나 1524년경 멕시코에 온 초기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고 밝혔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마리아 신심을 전파하는 데에 힘을 쏟았던 후안 디에고는 1548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관계자들은 덧붙였다.
복자 에스크리바는 1902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1925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1928년에 평신도 영성 운동인 '오푸스 데이'(하느님의 사업이라는 뜻)를 창립했다. 그는 1975년에 타계했으며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됐다.
이탈리아 출신의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를 집전과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자선 사업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금욕의 실천으로 유명한 카푸친 수도회 사제로서 1968년 8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또 복자 페드로 데 베탄쿠르는 17세기 베들레헴 수도회의 설립자로서 과테말라의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한 일에 헌신했다. 복자 베탄쿠르는 특히 가난을 탁월하게 실천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교황은 또 이들 외에 다른 5위의 복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5월 19일에 거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시성되는 복자들은 스페인 출신의 아우구스티노회 사제 알론소 데 오로즈코(1500∼1591 1882년 시복), 이탈리아 카푸친회원 이그나지오 다 산티아(1686∼1770), 칼라브리아 출신의 프란치스코회원 우밀레 다 비시나노(1582∼1637 1882년 시복), 이탈리아 출신으로 브라질에 건너가 원죄없으신 잉태의 작은 자매회를 세운 파울리나 도 코라카오 아고니잔테 데 헤수스(1865∼1942), 역시 이탈리아 출신으로 섭리의 베네딕도 수녀회 창립자 베네데타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1791∼1858)다. 특히 복녀 프라시넬로는 결혼 생활 2년 후 남편과 동의 하에 부부가 아닌 남매로 살다가 수녀원에 들어갔고 마침내 수도회를 세운 인물이다. [평화신문, 2002년 3월 10일]
성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 미사 봉사 기도로 유명
파드레 비오(Padre Pio 1887 ~1968)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파드레는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존칭이다. 비오는 그의 주보성인인 교황 성 비오 5세의 이탈리아어 이름으로 그가 수도회에 들어갈 때 새 주보성인의 이름으로 지은 수도명이다.
아버지 그라치오 포르지오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파 데 눈치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2살 때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 1903년 1월 6일 그는 모르코네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했고 그곳에서 1월 22일 비오 수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1916년까지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해 9월 산 조반니 로톤도로 간 그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와 미사로 유명하다. 사회적인 봉사활동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집을 1956년 5월 5일 설립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50년 이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사목활동으로 그에게 받는 고해성사로 그와 나눈 상담으로 그리고 그의 위로로 의지할 바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신부는 언제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1971년 2월 20일 비오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얻은 명성을 보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니요. 그는 겸손하게 바치는 미사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해소에 머물고 주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그의 성덕과 기적들은 거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카푸친회는 교회법에 따라서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했다. 비오 신부는 이에 따라 1999년 5월 2일 시복됐고 지난 2월 28일 시성이 결정됐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23일]
성 비오 신부는 기도와 사랑의 모범 교황 16일 시성식 거행 바티칸에 30만 인파 몰려
[외신종합] 세계적으로 이미 추앙받고 있는 카푸친회 소속 비오 신부의 시성식이 6월 16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교황은 이날 시성식에서 비오 신부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찬양하면서 『오늘 탄생한 새로운 성인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초대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하고 가장 숭고한 선익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비오 신부는 1968년 81세를 일기로 이탈리아 남부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타계했다. 시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지금까지 바티칸에서 열린 어느 대회보다도 많은 수를 기록했는데 특히 섭씨 36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시성식이 시작된 오전10시 전에 이미 3만5천석의 좌석과 2만1천여석의 입석이 모두 찼고 교황청에서 티베르강에 이르는 간선도로 등 바티칸의 주요 도로와 광장에는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곳곳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교황이 집전하는 시성식을 지켜봤다.
뜨거운 날씨와 많은 인파로 만일의 사고를 우려한 경찰과 구조 요원들은 도시 곳곳을 지키며 순례자들에게 75만여병의 생수를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교황은 오전10시 25분경 흰색과 황금색의 제의를 입고 라틴어로 비오 신부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예식서를 낭독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462번째로 성인으로 탄생시킨 파드레 비오 성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에서 비오 신부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만여개의 기도 모임들이 구성돼 있다.
이날 시성식에 함께 자리한 사람 중에는 비오 신부의 전구를 통해 병이 치유된 기적의 주인공들도 있었다. 1992년 불치병이 치유된 콘실리아 데 마르티노와 2년 전 회복 불가능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던 10세의 어린이 마테오 코렐라가 그들이다. 전자는 비오 신부의 시복을 가능하게 했고 두 번째 어린이는 이번 시성식을 가능케했다.
교황은 비오 신부의 삶과 신앙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기도와 사랑, 이것은 비오 신부의 가르침을 가장 구체적으로 요약하는 말』이라며 『비오 신부는 다시 한 번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말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말했다.
한편 비오 신부가 선종한 곳인 이탈리아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도 비오 신부의 시성을 기념하는 행사가 마련됐다. 비오 신부가 살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원조를 위한 집」을 설립했었던 이 곳에는 6만여명의 군중들이 몰렸다.
교황은 『이 겸손한 카푸친회 수도자가 살았던 십자가의 영성은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것이었던가』라며 『오늘날 우리 시대는 희망을 향해 창을 열수 있기 위해서 그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미사를 마치고 삼종기도를 바치면서 비오 신부를 전례 안에서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며 매년 9월 23일 그의 선종일을 기념해 해마다 미사 안에서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계서 기념행사
파드레 비오 시성 기념 행사는 바티칸과 이탈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함께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피에다드 성당에서 비오 신부를 기리는 미사를 거행했고 필리핀에서는 시성식을 앞두고 목요일부터 삼일기도를 시작해 마닐라에서 거행된 미사로 그 절정을 이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오 신부를 성인으로 선포하는 동안 인도의 투라 교구는 비오 신부에게 바치는 병원과 학교 건물을 축복했다. 챠드의 고아 교구에 있는 한 본당은 비오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9월에 설립될 예정인데 이 본당은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비오 신부를 주보로 모신 본당이 될 예정이다. 지난 몇 주 동안 고아의 300여개 마을에서는 비오 신부의 기도와 생애를 담은 기도문을 배포해왔다.
전세계에 2700여개를 헤아리는 비오 신부 기도 모임의 사무총장인 마르씨아노 모라 신부는 『우리는 양심이 깨어나고 기도를 향한 열정이 솟아남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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