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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리 & 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7) 헨리 나웬 신부 ①

by 파스칼바이런 2016. 2. 29.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7) 헨리 나웬 신부 ①

“행복은 성공의 사다리를 ‘내려오는’ 길에 있다”

발행일 : 가톨릭신문 2016-02-21 [제2982호, 16면]

 

 

「탕자의 귀환」 등 다수 영성서적 집필

학자이자 저술가로 성공가도 달리며

화려한 이면의 불안과 고독 상처 느껴

 

 

▲ 헨리 나웬 신부.

 

영성

 

헨리 나웬(Henri M. Nouwen, 1932~1996) 신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위로와 깨우침을 주는 대표적인 영성가입니다. 이미 고전이 되었다 할 「상처입은 치유자」나 「탕자의 귀환」을 포함한 그가 남긴 40여 권에 이르는 영성 저작들은 묵상의 깊이와 심리학적 이해, 섬세한 감성, 사려 깊은 표현들과 함께 저자 자신의 삶의 고민과 흔들림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진솔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저서들은, 1996년 그가 심장마비로 타계한 지 20년이 된 지금도 낡은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 여기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같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외적인 풍요와 쾌락, 화려함의 뒤편에서 현대인들이 겪는 불행감과 불만족,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 성공과 권력에만 매달리는 마음의 병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가 현대인들의 ‘깨어진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바라보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이러한 깨어진 마음, 흔들리는 감정, 올라가기 위해 버둥대는 삶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많은 인정과 성공, 정서적 친밀감에 매달릴 때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함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오직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생 여정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내려오는’ 길에 있으며 그것이 또한 예수님 십자가의 길이 보여주는 신비이자 모범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이러한 진리를 머리로서만 알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면서 공허감, 실패, 집착, 분노와 건강하지 못한 자기연민 등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민하게 대면한 사람이었고, 각고의 시간 끝에 한발씩 치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삶의 여정을 거쳐 몸과 마음으로 이러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저서에서 잘 보게 됩니다. 책들은 그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과 결단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이 점이 우리에게 그의 글들이 그토록 깊은 감동과 귀중한 영적 도움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삶의 여정과 죽음, 그리고 마지막 여행

 

헨리 나웬은 1932년 네덜란드 네이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는 것을 꿈꿨고, 마침내 1957년 25세 젊은 나이에 네덜란드 유트레흐트 교구의 알프링크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됐습니다. 서품 후 네덜란드 네이메헨 가톨릭 대학에서 심리학 공부를 마친 후, 미국에서 심리학 연구를 심화하고 사목신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자신의 식견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심리학 영역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인식들을 신학과 사목, 신앙 안에서 사려 깊게 또 유익하게 활용하는 길을 모색하고 시험하며 현대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자신의 영성 토대를 튼튼히 했습니다.

 

그의 저술과 강의와 강연, 세미나는 많은 관심과 높은 평판을 얻게 되었고 이제 그는 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경력의 가파른, ‘올라가는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40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한 외국인 사제이자 심리학자로서 이미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험을 거쳐, 예일대학 교수가 되었고 저서는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 속에서 그는 자신 안에 상처와 공허가 깊어가고 있음을 점점 감지하게 됩니다. 일찍이 자신의 교구를 떠나 외국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부터 뿌리가 단절된 근원적 외로움이라는 짐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주 대학이라는 보호받는 공간 안에서 “학적 언어로 영성과 사목신학을 펼치는 것이 일종의 자기모순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더욱이 자신의 강의와 강연, 저서에 쏟아지는 찬사와 인정에서 행복을 찾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 또한 찬사를 얻지 못할까 보이지 않게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불안감, 순간의 찬사가 지나간 후 홀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고독감과 공허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갈망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가의 범위를 벗어나, 스페인어를 배운 후 당시 독재정권의 억압 하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던 남미로 떠납니다. 나웬 신부는 남미의 한 슬럼가에서 머물며 가난한 사람들과 실제로 함께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현지 가톨릭 신자들이 예언자적 용기와 소명으로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데 연대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수많은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는 그에게 사회적 영성에 눈뜨게 한 소중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론 그가 많은 상처를 얻고 육체적, 영적 소진을 겪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시 하버드대학의 초대를 받고 다시금 대학으로 돌아옵니다만, 하버드대학 교수로서의 삶은 그에게 최종 해답이 될 수 없었고, 저술가로서의 세계적 명성도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1985년 그는 50대 나이에 대학 세계를 떠나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봉사하며 사는 작은 공동체인,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리치몬트 힐 소재 ‘새벽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생일대의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역시 현대의 매우 중요한 영성가이자 라르쉬 공동체(L’Arche Community)의 창시자인 쟝 바니에와 만나고 라르쉬 공동체를 체험하면서 이르게 된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동료 교수들은 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는 라르쉬에서 ‘약함의 힘’과 ‘내려가는 길’이라는 평생의 깨달음을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가 라르쉬에서 보낸 시간이 물론 고민과 고뇌, 좌절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끝까지 이 공동체에 충실하였고 그 안에서 진정한 성찬의 삶을 깨닫고 체험하였습니다.

 

1995년 가을 헨리 나웬 신부는 라르쉬 공동체의 배려로 안식년을 얻어 가족들과 친구들을 방문하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매일매일 묵상했습니다. 또한 라르쉬에서의 실천적 삶을 다시금 새로운 차원에서 내면에 자리한 깊은 관조에 대한 열망과 조화시키는 길을 모색하는 소중한 한 해를 보냅니다. 안식년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탕자의 귀환」과 그 책이 쓰여지도록 영감을 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렘브란트 그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한 네덜란드 방송국 제안에 따라 러시아로 떠나기로 합니다. 그 중간에 잠시 네덜란드에 머물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타계합니다.

 

이른 죽음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가 안식년 기간 동안 매일 남긴 묵상일기는 그의 평생의 영적 여정과 모색을 잘 담고 있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제 앞으로 3주간에 걸쳐 그의 안식년 동안의 마지막 일기를 살펴보면서 그가 삶에서 길어낸 영성을 만나고 우리 각자 사순시기에 걷게 되는 회심과 치유의 여정에 길벗으로 삼고자 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