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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미 시인 / 밤의 프랑스어 수업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4.

김경미 시인 / 밤의 프랑스어 수업

 

 

        스물한 살이거나 하다못해 서른네 살도 아닌데

        돌은 썩고 물은 굳는데

         

        기차는 낭비를 싣고 어제도 오늘도 달리네.

        금잔화보다 시끄러운 이빨을 드러내거나

        구멍 난 검정타이어처럼 질질 끌거나

        바닥없는 슬리퍼가 되거나 원장이 달아난 병원이 되고

        소방차들 물 뿌리고 간 전소(全燒)가 되어 달리네.

         

        아무리 낭비해도 종착역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

        껌 종이를 열거나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가르듯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무엇입니다, 까지만

        수월하리라는 것.

        혀를 잡아당기고 놓치고 다시 잡아당기다

        또 놓쳐 얼굴에 고무줄 맞는 낭비나 반복되리라는 것.

        벚꽃이나 수박처럼 한 계절도 채 못 넘기리라는 것.

        입안에 숨어든 혀가 오늘도 내일도 계속 감추리라는 것.

        오 분은 고사하고 삼 분도 안 되어 대화가 끊기리라는 것.

         

        그래도 기차는 또 다른 낭비를 싣고 다시 출발하겠지.

        밤의 강의실은 밤바다처럼 넓고

        청춘남녀들에게선 복숭아 냄새가 나는데

        어둔 창밖으로는 밤비가 내리는데

        밤비답지 않게 세찬데

        낭비는 더 세차고

        그 이유와 원리를 모르겠으나 아무튼

        복숭아털인지 스웨터 보푸라기인지 자꾸 입가에 들러붙고

        프랑스로 출발도 하기 전에

        낭비만 더 늘고 고무줄만 더 늘어나리라는 것.

        얼굴만 아프리라는 것.

         

        오늘은 하필 얼룩말 무늬의 옷까지 입었으니

        저 비를 맞으면 가짜 줄무늬가 금세

        얼기설기 번지거나 흐려지겠지 맨몸이 드러나겠지.

        밤비는 더욱 세지고 우산도 없고

        다음 기차로 곧 따라갈 테니 먼저 가 기다리라고

        괜히 손을 한번 흔들어보겠지만

        곧 만날 듯하겠지만

        점점 더 어이가 없고

        점점 밤만 깊어지고 시간 낭비만 거세지고

        우산 나눠 쓸 사람도 없고

         

        이 모든 게 프랑스어가 아닌

        한국어와의 일.

 

계간 『시산맥』 2017년 여름호 발표

 


 

김경미(金京眉)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95), 『쉬잇,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1)『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 등과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