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미 시인 / 문학과 나
나는 오랫동안 문학의 식민지로 살았네.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한편으론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감미로웠네. 언어는 내 피였고 문학은 내 연인이었네. 나는 날마다 문학 속의 연인들을 바꾸어가며 사귀었네. 현실에선 연인이라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날마다 깊은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뜨겁게 온몸이 달아올라 있었네. 책 속에 있는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사랑이었으며 책 속에 있는 고독은 이 세상 모든 고독이었네. 나는 그 속에서 최상의 여자였으며 최악의 여자였네.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행복할 때가 더 많았네. 그 모든 게 내가 만든 광기요, 환상이며 도피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순간순간 그 황홀한 엑스터시와 오르가슴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되어 온 낮과 밤을 헤매 다녔네. 그러곤 그 찌꺼기들을 모아 나도 그들처럼 문학을 흉내 내었네. 끝없이 흉내 내고 끝없이 위반하고 끝없이 매달리고 끝없이 찬미하였네. 이 세계에선 신도 악마도 어른도 아이도 다 똑같은 문학, 은유일 뿐이었네 다른 이들은 삶을 바꾸는 데 한평생이 걸린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삶을 바꾸고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또 살려내었네. 내게 필요한 건 자유자재로 나를 무장해제시켜 즐겁게 내 두발이 딛고 설 마법 같은 문학뿐. 나는 그 속에서 누구보다도 천진하고 기쁘게 그의 식민지가 되었네. 내 안에 사는 무수한 타자도, 자아도 이제는 그런 나를 탓하지 않네. 그들 또한 나처럼 온갖 문들이란 문은 다 열어놓고 맘껏 바람과 햇볕을 쬐고 있네. 비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폭설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나는 이곳에서 남김없이 나를 탕진하고, 소모하고, 사랑하다 떠날 작정이네. 이제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실패하고, 깨어지고, 무너져도 상관이 없네. 나는 평생 문학의 속국으로 살며 또한 그 속에서 멋지게 죽는 법도 배웠네. 사랑하라, 사랑하라, 맘껏 사랑하라! 그 사랑 없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숨고, 도망치고, 거주할 곳이 없었네.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문학나무뿐. 내가 나를 송두리째 바치고 희롱하고 주무르다 푹푹 썩힌 후, 황송한 그 나무의 한 끼 거름이 되는 것뿐.
계간 『시와 표현』 2019년 3~4월호 발표
김상미 시인 / 포커 치는 개들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 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15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과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간 선물보따리를 풀며 마치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 척 환하게, 환하게 웃다가, 거실 한가운데 턱하니 걸려 있는 C. M. 쿨리지의 그림 「포커 치는 개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머, 저 개들 좀 봐. 개들인 주제에 인간인 척 열심히 포커 게임 중이네. 기분 묘하게도 우리처럼 딱 일곱 마리네. 하기는 요즘엔 인간이나 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니 개가 인간인 척한다고 놀랄 일도 아니지. 우리도 저들처럼 신나게 포커나 한 판 칠까? 그러고선 쪼르르 카드를 가지러 가는 주인 부부. 하긴 오늘 우리가 척, 척, 척하며 그들에게 흔들어댄 꼬리만 해도 얼마냐. 졸지에 인간 아닌 척 신나게 포커 치는 개가 된다한들….
계간 『시현실』 2019년 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호주머니 가득 평화를 담고
시집들이 참 많소. 내 방에만 해도 시집들이 한 가득이오. 하지만 안 읽고 쌓아놓은 시집들은 몇 권 안 될 게요. 내가 쓴 시들의 몇 십 배, 아니 몇 백 배는 될 성싶소. 그렇게 많은 시집들을 읽었음에도 외우는 시들은 몇 편 되지 않소. 예전엔 아무리 긴 시도 외우는 재미와 맛이 있어 외우는 데 참 많은 공을 들였소. 참 좋은 시절이었소. 하지만 요즘은 꽤 공을 들여도 내 시조차도 잘 외워지지가 않소. 오늘 겨우 데릭 월컷의 시 한 편을 외웠소. 사랑이 끝난 후의 사랑이라는. 하지만 모레쯤이면 그 시도 다 잊어버릴 것이오. 그래도 외울 땐 마음이 참 짠했소. 시에는 별빛 같은 선견지명이 숨어 있어 때로는 시 한 편이 뼛속까지 스며들 때도 있소. 그래서 시를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계속해서 시를 읽게 되나 보오. 그래도 내 방에는 정말 시집들이 너무 많소. 저 많은 시집들이 때로는 엄청나게 겁나고 무섭소. 오늘도 몇 권의 시집들이 내게로 배달되어 왔소.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 시집들을 펼쳐보기가 싫소. 오늘만은 다른 일을 하고 싶소. 시집도 시도 없는 평화를 호주머니에 넣고 자연 속을 누비고 싶소. 아무 짓도, 아무 생각도 없이 나조차도 잊고 싶소. 마침 바람도 상큼하니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이오. 가까운 천川에 먼저 들를 생각이오. 시선이나 마음 둘 곳이 필요할 땐 흐르는 물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거요. 물은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미덕이 있잖소. 오늘은 그 물로 나를 깨끗이 헹궈내고 오래오래 날다 돌아오겠소. 호주머니 가득 평화를 담고.
계간 『주변인과 문학』 2019년 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경미 시인 / 밤의 프랑스어 수업 (0) | 2019.05.14 |
|---|---|
| 고영 시인 / 상투적 외 6편 (0) | 2019.05.13 |
| 송종규 시인 / 그것은 나비의 일 외 1편 (0) | 2019.05.13 |
| 전인식 시인 / 아내는 고슴도치 외 1편 (0) | 2019.05.13 |
| 권여원 시인 / 이석증 외 1편 (0) | 2019.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