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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문학과 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3.

김상미 시인 / 문학과 나

 

 

나는 오랫동안 문학의 식민지로 살았네.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한편으론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감미로웠네.

언어는 내 피였고 문학은 내 연인이었네.

나는 날마다 문학 속의 연인들을 바꾸어가며 사귀었네.

현실에선 연인이라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날마다 깊은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뜨겁게 온몸이 달아올라 있었네.

책 속에 있는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사랑이었으며

책 속에 있는 고독은 이 세상 모든 고독이었네.

나는 그 속에서 최상의 여자였으며 최악의 여자였네.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행복할 때가 더 많았네.

그 모든 게 내가 만든 광기요, 환상이며 도피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순간순간 그 황홀한 엑스터시와 오르가슴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되어 온 낮과 밤을 헤매 다녔네.

그러곤 그 찌꺼기들을 모아 나도 그들처럼 문학을 흉내 내었네.

끝없이 흉내 내고 끝없이 위반하고 끝없이 매달리고 끝없이 찬미하였네.

이 세계에선 신도 악마도 어른도 아이도 다 똑같은 문학, 은유일 뿐이었네

다른 이들은 삶을 바꾸는 데 한평생이 걸린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삶을 바꾸고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또 살려내었네.

내게 필요한 건 자유자재로 나를 무장해제시켜

즐겁게 내 두발이 딛고 설 마법 같은 문학뿐.

나는 그 속에서 누구보다도 천진하고 기쁘게 그의 식민지가 되었네.

내 안에 사는 무수한 타자도, 자아도 이제는 그런 나를 탓하지 않네.

그들 또한 나처럼 온갖 문들이란 문은 다 열어놓고 맘껏 바람과 햇볕을 쬐고 있네.

비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폭설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나는 이곳에서 남김없이 나를 탕진하고, 소모하고, 사랑하다 떠날 작정이네.

이제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실패하고, 깨어지고, 무너져도 상관이 없네.

나는 평생 문학의 속국으로 살며 또한 그 속에서 멋지게 죽는 법도 배웠네.

사랑하라, 사랑하라, 맘껏 사랑하라!

그 사랑 없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숨고, 도망치고, 거주할 곳이 없었네.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문학나무뿐.

내가 나를 송두리째 바치고 희롱하고 주무르다 푹푹 썩힌 후,

황송한 그 나무의 한 끼 거름이 되는 것뿐.

 

계간 『시와 표현』 2019년 3~4월호 발표

 

 


 

 

김상미 시인 / 포커 치는 개들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남자다운 척 있는 대로 폼 잡다 어른이 된 남자와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여자다운 척 있는 대로 내숭떨다 어른이 된 여자가, 결혼한 지 15년 만에 큰 집을 장만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근사한 정원인 척하는 잔디밭과 몇 그루 꽃나무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과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간 선물보따리를 풀며 마치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 척 환하게, 환하게 웃다가, 거실 한가운데 턱하니 걸려 있는 C. M. 쿨리지의 그림 「포커 치는 개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머, 저 개들 좀 봐. 개들인 주제에 인간인 척 열심히 포커 게임 중이네. 기분 묘하게도 우리처럼 딱 일곱 마리네. 하기는 요즘엔 인간이나 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니 개가 인간인 척한다고 놀랄 일도 아니지. 우리도 저들처럼 신나게 포커나 한 판 칠까? 그러고선 쪼르르 카드를 가지러 가는 주인 부부. 하긴 오늘 우리가 척, 척, 척하며 그들에게 흔들어댄 꼬리만 해도 얼마냐. 졸지에 인간 아닌 척 신나게 포커 치는 개가 된다한들….

 

계간 『시현실』 2019년 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호주머니 가득 평화를 담고

 

 

시집들이 참 많소. 내 방에만 해도 시집들이 한 가득이오. 하지만 안 읽고 쌓아놓은 시집들은 몇 권 안 될 게요. 내가 쓴 시들의 몇 십 배, 아니 몇 백 배는 될 성싶소. 그렇게 많은 시집들을 읽었음에도 외우는 시들은 몇 편 되지 않소. 예전엔 아무리 긴 시도 외우는 재미와 맛이 있어 외우는 데 참 많은 공을 들였소. 참 좋은 시절이었소. 하지만 요즘은 꽤 공을 들여도 내 시조차도 잘 외워지지가 않소. 오늘 겨우 데릭 월컷의 시 한 편을 외웠소. 사랑이 끝난 후의 사랑이라는. 하지만 모레쯤이면 그 시도 다 잊어버릴 것이오. 그래도 외울 땐 마음이 참 짠했소. 시에는 별빛 같은 선견지명이 숨어 있어 때로는 시 한 편이 뼛속까지 스며들 때도 있소. 그래서 시를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계속해서 시를 읽게 되나 보오. 그래도 내 방에는 정말 시집들이 너무 많소. 저 많은 시집들이 때로는 엄청나게 겁나고 무섭소. 오늘도 몇 권의 시집들이 내게로 배달되어 왔소.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 시집들을 펼쳐보기가 싫소. 오늘만은 다른 일을 하고 싶소. 시집도 시도 없는 평화를 호주머니에 넣고 자연 속을 누비고 싶소. 아무 짓도, 아무 생각도 없이 나조차도 잊고 싶소. 마침 바람도 상큼하니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이오. 가까운 천川에 먼저 들를 생각이오. 시선이나 마음 둘 곳이 필요할 땐 흐르는 물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거요. 물은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미덕이 있잖소. 오늘은 그 물로 나를 깨끗이 헹궈내고 오래오래 날다 돌아오겠소. 호주머니 가득 평화를 담고.

 

계간 『주변인과 문학』 2019년 봄호 발표

 

 


 

김상미 시인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와『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 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