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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시인 / 상투적
우리는 너를 단편적으로 기록할 것이다. 사실과 진실 사이 불가역(不可逆)에 대해 처방전과 처방 후의 증상을 관찰하듯이 관여자와 보호자 사이, 그 뛰어넘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우리는 나를 단편적으로 기록할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의 과실과 너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감촉과 수선화를 죽인 수선화의 아름다움과 요오드 용액과 과산화수소수의 냉정함에 대해
태어나기 전부터 일생을 다 살아버린 사람처럼
우리는 빠르게 잊힐 것이다.
가지 않은 소풍을 여러 번 가본 아이처럼, 꽃을 보기 전에 꽃을 뽑아버린 사람처럼 우리는 오해되고 상투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계간『포지션』 2018년 겨울호 발표
고영 시인 / 기시감
한적한 시골 도로에 한적한 시골 버스가 지나간다
승객도 없고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나가는 버스를 물끄러미 말린 겨우살이를 손질하며 본다
겨우살이는 참나무에 얹혀살고 우리는 겨우살이에 얹혀산다
유난히 찬란한 봄볕 아래서 우리는 서로 간절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버스 안에서 호기심의 눈빛으로 우리를 내다보는 운전기사에 대한 배려
하루에 네 번 겨우 형체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버스를 닮아가는 것인지 너는 단양에 온 후 정기적으로 미소를 꺼내 보여준다 그것이 최선이라는 듯
노후를 맞기도 전에 몸의 중심이 텅 비어버린, 그래서 앉는 것조차 불편한 의자에 묻혀
너는 버스의 종착지를 보고 나는 버스가 흘리고 간 매연(煤煙)을 본다
계간『포지션』 2018년 겨울호 발표
고영 시인 / 보호자
내겐 근엄한 표정이 필요해
아침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우리는 에덴의 서쪽으로 산책을 간다
기껏 백 미터 걷는 데도 네겐 용기가 필요해 몇 걸음 못 가서 주저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근력
한 발짝만 더 바로 저기가 천국이야 한 발짝만 더
서쪽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초콜릿처럼 서로에게 녹아들어야 해
자 이제 다시 걷기 온몸이 투명해질 때까지 걷기 너의 의자가 너를 다 잊을 때까지 걷기
한 발짝이라는 그 머나먼 광년을 함께하기 위해서
내겐 근엄한 표정이 필요하고 네겐 용기가 필요해
계간『문학의 오늘』 2018년 겨울호 발표
고영 시인 / 면역력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신은 의자에 잠겨 있었다. 의자 속에 무덤을 파고 부장품이 되어버릴 시를 쓰고 있었다. 훗날의 시집*이었다.
요람에서부터 이미 늙어버린 당신에게서 소녀를 꺼내야 했다. 하지만 소녀는 고집스러웠고 집요했으며 과거형이었고, 결정적으로 의자를 너무 사랑했다.
그랬다. 의자는 믿을 수 없는 세포로 이루어진 유기체였다. 우물보다 깊고 신앙보다 더 간절한 세계에서 당신을 꺼내주고 싶었다.
무언가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땐 나는 이미 늦어버린 것
한번만 알아 달라는 말을 한번만 안아 달라는 말로 오인(誤認)하며
손도 잡기도 전에 당신을 먼저 만졌다. 차가웠다. 썩어문드러진 소녀의 심장이 묻어났다.
우리는 끝내 관계를 맺지 못했다.
*배영옥 시인의 시 제목.
계간『문학의 오늘』 2018년 겨울호 발표
고영 시인 / 유대감
돌이킬 수 없음, 에 대해 우리는 해명할 시간이 필요하다.
전부(全部)였거나 전무(全無)였거나 빛이었거나 어둠이었거나 요란했거나 과묵했거나 존경했거나 증오했거나 행복했거나 불행했거나 선했거나 악했거나 아름다웠거나 혹은 아름다움을 가장했거나 배타적이었거나 이타적이었거나
이 모든 사실들은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
부산에서 단양까지의 간극 294킬로미터 그 거리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의 짧은 생애처럼 벚꽃이 흩날렸기 때문 나의 슬픔처럼 비가 내렸기 때문
이것은 해명이 필요 없는 우리만의 관계
너무 많은 약(藥)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처음으로 인간답게 틈을 보인다.
너의 고통은 너의 진실 나의 고통은 나의 진실
돌이킬 수 없음, 에 대해 우리는 점점 대담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다 소진한 사람처럼 특별해진다. 생의 문외한처럼.
계간『학산문학』 2018년 겨울호 발표
고영 시인 / 동질감
큰 눈을 가진 사람과 면사무소 간다
단양에 살면서도 단양은 멀고
가는 봄비는 가는 봄비의 행방을 모른다
흰 민들레와 노란 민들레의 효능에 대한 사소한 실랑이 끝에 우리는 사실 관계에 집중하기로 하고 손을 잡는다
배후(背後)를 자처했지만 배면(背面)의 슬픔만 지켜봐야 하는 무기력
전입신고를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수선화와 함께 가는 비와 함께
그리고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단양에 살면서도 단양은 여전히 멀고
계간 『시인시대』 2018년 겨울호 발표
고영 시인 /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월간 『현대문학』 2018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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