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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시인 / 숨겨진 방
잣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툭 굴러 떨어지는 잣나무 열매를 비켜 나는 소녀난민처럼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이 세상 한 쪽으로 떠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 아주 잠깐이지만 떠난 사람들을 생각했고 추억으로 가득 찬 무거운 방을 생각했고 대낮에도 떠오르지 않은 숨은 태양을 생각했고 대낮에도 어딘가 떠있는 숨은 달을 생각했고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있어 아름다움이란 먼 곳에서 되돌아온 헛것이라는 생각
달이 뜨고 당신과 나의 경계처럼 두 뺨에 물 흔적선이 선명해 질 때 시든 풀잎 같고 국경 같은 입술이 불타는 걸 봤어 붉게, 젖어서, 젖은 것들도 불탄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잡히지 않은 불길이 있다는 걸 재가 되어야 끝나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았어 아, 물론 이제부터 재의 이야기가 시작되겠지만
낮과 밤의 경계에 당신은 선을 그을 수 있겠어? 선(線)이든, 선(善)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정확하게 뭔가를 그을 수 있는 자의 표정을 보고 싶어
나는 기억을 수집하는 척후병처럼 생각에 잠겨 있어 못에 걸린 방은 가끔 자지러지게 울고 검은 타액으로 자신의 몸을 닦아내고 있어 달은 저 혼자 희미한 저녁을 떨어뜨리고 태양은 재의 이야기를 어딘가에 숨긴 채 피어나고 있어
버렸다가 되찾아오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 했어 한 번 가진 적 있는 방을 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내 산책의 시작은 발등을 스르륵 지나간 외로움으로부터 달릴 수 있는 다리와 날아갈 수 있는 숨겨진 날개와 어디든 살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다 잊었다고 말하는 순간들도 별들처럼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고 있겠지 낮보다 밤에 우주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는 건 별 때문이야 낮엔 별에 관한 거짓말을 하고 밤엔 반짝이는 별을 보며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기도 해 내 심장은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눈물을 떨어뜨리지 세상의 숨겨진 방들처럼 말이야
월간 『시와 표현』 2017년 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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