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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시인 / 인조 당단풍 나무
붉새에 잠긴, 광중길 공원가에, 투섬플레이스 입간판 옆에, 소사나무 숲 건너편에, 인조 당단풍 한그루 외따로 서있다. 애초 물기 없던 몸이라 저녁놀도 성가신지 빛조차 없다. 계절을 베낄 일 없으니, 사철 빳빳한 인조 잎사귀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저 나무, 단 한번 살지도 선뜻 죽지도 못하는 저 나무, 건너편 소사나무들의 생로병사가 마냥 부러운 저 나무, 오래 볼 요량으로 숨을 거두어들인 박제 같은, 나무야나무야 당단풍나무야 진짜 이름 불러주고 싶은 저 나무, 죽어도 귀는 열려있다지, 칭칭 감은 알전구에 불을 켰다. 100촉짜리 꽃을 주렁주렁 피워낸, 어둠에 들어서야 제 존재를 알리는 저 나무, 오히려 나무 같다.
계간 『불교문예』 2018년 겨울호 발표
이령 시인 / 비가(悲歌) 내리다
겹창을 열자 화단에 모인 시간들이 울고 있다.
꽃의 표정은 늘 문 앞에 있었는데 닫기만 했다는 생각 계절을 미처 받아 적지 못했다는 생각 그래서 누군가와 꽃같이 아득하게 단 한번 살아본 적 없다는 생각.
아물지 못한 계절, 꽃 지고 있다. 비의 투하에 터진 비명들, 아프기 때문이다. 어떤 울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작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이었음. 어떤 울음도 웃음보다 아플 수 없음, 피었다. 진다. 진종일
사랑융단폭격에 베어본 사람일지라도 이생에서 타전하지 못할 한 영혼을 품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이 음률탁란에 거듭 개화(開花)될 울음 우는 사람일지라도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도 기껏해야 몇 생을 견디는 일이었는데 곡조를 이기지 못한 어떤 슬픔도 간신히 한 생의 일이었는데 장마 전선을 통과하는 슬픔들, 계면조로 옴팡지게 왔다. 갔다.
계간 『사이펀』 2018년 겨울호 발표
이령 시인 / 문단도킹
식탁위의 오렌지를 유한개로 쪼개어 붙이면 우주다 나는 유한의 글자를 이어붙이는 무한 우주인이고 식탁은 미묘한 공포가 흐르는 무대다 요즘 식탁 밖의 오렌지는 소음이고 지구 종말의 잠언이다 해독 불가한 오렌지글자군단이 무차별로 공격 한다 눈, 코, 입은 후방, 사방이 거처인 귀를 전방에 배치해도 날마다 패전이다 귤도 탱자도 오렌지 비슷하다 오렌지는 오렌지를 잊고 귤과 탱자는 서로 원조라며 상을 주고받는다. 오렌지가 되레 포복하는 놀라운 식탁, 안팎의 시큼한 이야기다 오렌지와 오렌지종의 넓지만 온기 없는 이상한 집! 식탁만의 문제겠는가? 오렌지글자가 못 마땅한 우주인 입맛의 문제겠는가? 저 우주에 닿기 위해선 지구를 떠나야만 하나? 식탁은 더 이상 식탁이 아니다. 식탁의 풍경이 어지럽다
계간 『사이펀』 2018년 겨울호 발표
이령 시인 / 아주 현실적인 L씨가 오제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
도무지 이 악장을 지나칠 수 없다 사코리투스의 후예답지 않게 모난 나는 늘 마이너코드다
올림내림올림내림 올림올림 내림내림 세상은 1,4,5,8 음정에서만 완전음
늦었다고 생각할 때 가장 늦은 거야 후생은 없어 마음대로 살란 말이야 생의 관절 마디마디 파열음이 부지기수다
나이도 많고 아이도 있는 내가 나이도 어리고 아이도 없는 소녀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온음과 반음, 셈여림에 질식하며 대칭구조로 꾸역꾸역 오늘을 살다 죽을 것인가
점점빠르게 혹은 점점느리게 항문과 입은 한통속 점점아프고 점점무감하게 반음 올려 볼까 반음 내려 볼까
기존의 음이 갈리며 새 음이 생겨나듯 비스듬히 빌붙으며 리듬을 타볼까 나의 진화는 지금 반음에 걸려있다
어제와 오늘의 크로스오버처럼 쪼개고 쪼개도 완전체를 꿈꾸는 사코리투스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되풀이 하지 않고 여기서 마침. 마침내 삶과 죽음이 동시에 열리자 푸른 입들이 뿜어내는 저 불협화음처럼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2번째 곡
계간 『시작』 2017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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