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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연명지 시인 / 점말동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9.

연명지 시인 / 점말동굴

 

 

점말 할머니 말투는 동굴을 닮았지

 

동굴은 그 수명이 다하고 나면 자연사 박물관이 된단다. 이렇게 크고 우거진 등을 본 적이 있니? 갈참나무, 화살나무 동굴의 등에는 온갖 수종들의 나무가 자란단다. 혀를 닮은 이파리 다 떨어진 겨울엔 동굴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잔단다.

 

똑, 똑 초침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는

동굴의 안쪽은 늘 배가 고프지.

박쥐 몇 마리 외엔 물방울 울림만 먹고 살지.

 

그 옛날에는 모닥불과 아이의 울음소리를 먹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단다. 내부가 지루한 시대가 지나면 너른 들판과 별들의 밤이 새로운 시대를 판서判書했을 것이고 타고 남은 불의 토막 끝으로 토끼와 아이들의 웃음을 그렸단다.

 

지금도 그곳에서 기침을 하면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단다.

 

식인이었다는 학설, 사람의 뼈와 밥그릇과 동물과 자연의 접속사 같은 흔적이 발견되는 동굴, 웅크린 시간을 펴지 않아 내부는 온통 엉킨 뼈들이 비좁단다.

 

오래 공복이었던 내부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관람하고 동굴은 다시 우적우적 제 속을 채울 것이지만 점말 할머니의 목소리엔 동굴 속 메아리가 붙어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오래오래 따뜻하단다.

 

*점말동굴: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점말'이라는 곳에 있는 구석기 시대의 동굴 유적지.

 

시집 『사과처럼 앉아있어』(천년의시작, 2017) 중에서

 

 


 

 

연명지 시인 / 손에 묻은 이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명보험 수급을 신청했다.

 

동생이 들고 온 증서에는 동백꽃 한 송이, 어머니 이름 옆에 꽃물 번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붉은 사월이 지나간 자리 홑잎으로 날리다 만 이름 하나 번져 내 손가락 끝에 묻어왔다.

 

수급 신청란에 내 이름을 찍었다. 이름은 싱싱한 핏기로 둥근 도장의 원을 넘쳐 겹쳐진 꽃송이처럼 접힌 두 생 사이에 묻기까지 했다.

 

손에 묻은 이름을 천천히 휴지로 닦아내었다.

 

엄마는 아픈 이름을 오래 사용한 듯, 봄이라 여긴 곳마다 꾹꾹 찍어놓고 갔다. 뒤늦은 꽃 소식처럼 이곳저곳에서 엄마 이름이 자꾸 날아온다.

 

엄마가 찍어놓고 간 이름의 온기로 한겨울 같은 봄을 견뎌야 하겠지만 왜 낭떠러지 끝 같은 곳마다 붉은 꽃 찍어놓고 갔을까. 발밑은 아득해서 어떤 꽃잎은 땅에 닿기까지 몇 년은 걸릴 것 같은데

 

봄날은 간다, 즐겨 부르던 엄마의 연분홍 치마 풍으로 바람이 또 분다.

 

시집 『사과처럼 앉아있어』(천년의시작, 2017) 중에서

 

 


 

연명지 시인

충북 괴산에서 출생, 2014년《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가시비』, 『사과처럼 앉아있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