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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민 시인 / 토마토가 치마끈을 풀었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9.

이혜민 시인 / 토마토가 치마끈을 풀었다

 

 

고추 밭 사이에 끼어 눈칫밥 먹던 시절을 뒤로 하고 막, 꽃 봉우리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꿈꾸던 연둣빛 치마끈을 풀었다 턱수염이 숭숭 난 제법 힘쓸 만큼 굵어진 아카시아 나무의 짝이 된 것이었다 씨암탉 알 낳듯이 염치머리 없이 새끼를 낳았다 돌아보니 어느새 올망졸망 한 꾸러미였다 된 시앗 뙤약볕 밑에서 기둥서방 허리춤 잡으랴, 시퍼런 새끼들 주저앉히랴, 등은 굽어지고 무릎도 꺾였다 덧정 나눈 분신들마저 떠나갔다 저승사자 겨울도 그녀의 코앞까지 왔다 곪아 터진 등골로 목을 떨어뜨렸다 끝물로 일어선 눈망울들이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무서린 내린 오늘 난, 눈물도 없이 토마토 시신을 거두어 화장시켜 드렸다

 

시집 『토마토가 치마끈을 풀었다』(시평사, 2006) 중에서

 

 


 

 

이혜민 시인 / 물오리가족

 

 

  태풍에 집을 잃고 간신히 살아

  다리 그늘 막을 두르고 이사를 온 오리가족

  사람들이 던져주는 간식을 받아 먹고 있다

 

  우리시절엔 숨 참아가며 물속에 들어가 고생했지만

  너희들에겐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고생하지 않고도 먹고 살수 있다고

  꼭 물고기를 주식으로 먹어야만 오리다운 건 아니라고

  사람들이 던져 주는 재미있는 놀이가 우리에겐 주식이라고

  사람들 손끝에서 눈을 떼는 순간 굶어 죽는다고

  새끼들 곁을 지키는 부모 오리가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지휘자 지휘봉 끝을 노려보는 단원들처럼

  일사 분란하게 리듬을 타고 몸을 바꾸는 저 놀라운 실력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많이 했을까

  아마도 물갈퀴는 더 넓어졌고 발톱은 살 속을 파고들어 갔으며

  한 번도 펴 본 적 없는 날개는 깃털이 사라지고 뼛속은

  소화되지 못한 세상 오물들이 꽥꽥 들어차 있겠지

  말을 잃어 버린 듯 살 오른 모가지만 길게 빼고

  벌어진 주둥이로 마른 소리만 질러댔다

 

  그 소리를 알아들어서일까

  나는 아직도 세상을 자맥질 하여 된 고기를 물어 다

  새끼 입에 넣어 주고 있다고

  자맥질 하는 고된 현장을 새끼들은 보면 안 된다고

  쉽게 쉽게 물고기는 잡히는 거라고

  투정하지 말고 잘 먹고 살 오르면 되는 거라고

 

  다리 밑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참으로 깐깐한 생각을 했다

 

인터넷신문 『후아이앰』 2016년 11월 발표

 

 


 

이혜민 시인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2003년 《문학과 비평》 여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토마토가 치마끈을 풀었다』(시평사, 2006)가 있음. 2006년 경기문화재단 기금수혜. 경기문학위원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