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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종규 시인 / 슬픈 손가락처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1.

송종규 시인 / 슬픈 손가락처럼

 

 

날렵하게 고양이가 지나갔다, 고양이는 햇빛의 장르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아니 봄날 오후였다. 당신을 보내고 돌아오던 사십 전 후, 햇빛 쏟아지는 정오 무렵이었다. 접시 위에 푸른곰팡이가 내려앉기도 전에, 낡은 슬리퍼를 끌고 한 시대가 지나갔다. 아무리 아니라고 당신이 우긴다 해도

 

고양이는 거짓말, 고양이는 과거

 

촛불을 켜고 케이크를 자른다. 말랑한 빵이 산맥처럼 갈라진다. 친절하던 불빛과 사무치던 꽃의 입술들이 능선처럼 누워있다. 환락과 후회 같은 것 말고, 총체적인 비극과 부조리와 몽환 같은 것도 말고, 접시는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낸다.

 

기억의 한 티끌까지

촛농이 떨어져 이루는 산맥의 단애가 마그마처럼 들끓는다.

 

황홀한 것은 모두 나비처럼 가볍다, 가벼워서 자주 파탄에 이른다, 이 저녁의 적요는 중세의 것 쏜살 같이 빠져나간 것들이 너무 많은 골목길을 헐렁해진 태양이 굴러들어간다. 날렵하게, 고양이가 촛불과 산맥과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 지른다. 자작나무 발목이 어스름에 파 묻힌다.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고양이는 봄날, 고양이는 폐허

 

쏜살같은 고양이가 무수한, 무수한 이야기와

무수한 레시피와 무수한 법칙과 반칙이 수북한 접시 위에

슬픈 손가락처럼, 포크가 놓여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6월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지속적인 공중

 

 

그날 나는 강보에 쌓여있었고

그날 나는 꿈결 같은 구름 위에 살포시 얹혀있었다.

뭉쳐졌다가 흩어지는

구름의 행렬들

 

오래된 교회의 마룻바닥에서 나무 냄새가 휙하고 지나갈 때, 문득

난생 처음인 세계가 덜컥 빗장을 열었을 때

 

그날 나는 강보에 쌓여있었고

그날 나는 잔잔한 물결 위에 누워있었는데

일사분란하게 저녁이 오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 많은 햇빛과 편서풍이 어떻게 내 생에 개입했는지

당신이 어떻게 그 빈 들판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맞으며 서 있었는지

나는 어떻게, 치사한 어른이 되어있는지

 

무소의 뿔처럼 수많은 아침이 솟아올랐고

나는 전력으로, 먼발치에서 오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만 강보에 쌓여있었고 꿈결같이 나른한

종소리 위에 누워있었을 뿐인데

 

나는 지속적으로 뿌리가 질긴 나무가 되어갔다.

나는 지속적으로 커다란 공중이 되어갔다.

 

 

계간 『모:든시』 2017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꽃의 안 쪽

 

 

새벽의 공기가 출렁일 때

몇 개의 강이 은하를 건너오고 있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상처투성이 얼굴로 몇 개의 사랑이 저무는 것을 지켜봤다.

 

몇 개의 강과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

 

강의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수관의 입술에는 경첩 하나 달리지 않았지만

꽃은 이미 여러 겹의 새벽과 몇 겹의 강을 통과해 왔다.

 

히아신스가 꽃대를 밀어올리는 것은

새벽이라는 두꺼운 책을 견뎠기 때문이다.

 

꽃이 더러 흐느끼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만

더 이상 새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는다.

 

사랑이, 문장의 피투성이 속으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히아신스가 조금 기울어져 있다. 그 쪽이, 뜨거운 꽃의 안 쪽이다.

 

계간 『시인 시대』 2017년 봄호 발표

 


 

송종규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둥지, 1990), 『고요한 입술』(민음사, 1997),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시와반시사, 2003), 『녹슨 방』(민음사, 2006),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이 있음. 2005년 대구문학상 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2013년 제3회 웹진『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3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올해의좋은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