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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인 / 수학자 누(Nu) 14
밤의 숲속 펜션이다 빗속에서 누가 창을 계속 두드린다 잠에서 깨어보니 폭우가 내린다 속옷까지 젖은 마고자 차림의 노인 나유타가 서 있다 입술이 뜯겨 있고 턱을 타고 피가 번지고 있다
옆구리에 도화(桃花)나무 가지가 돋아 있다 노인은 나무를 쑥 뽑아서 내게 건네주며 말한다 이 아인 내 증손녀 문체요 이 아이를 꼭 살려주시오! 노인의 옆구리에서 검은 강물이 콸콸 쏟아진다
서쪽 하늘에서 번개가 친다 나는 떨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본다 며칠째 내가 꿈속에서 마주쳤던 눈먼 소녀다 등은 흰 꽃잎으로 덮여 있고 가슴과 배엔 초서체 문자들이 어지럽게 휘갈겨져 있다
내가 비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자 노인은 사라지고 하늘에 파란 곡선이 길게 번진다 암벽에 숫자와 한자가 섞인 개화방정식이 음각된다 나는 다시 펜션으로 돌아와 욕실로 가 아이를 씻긴다
노란 수건으로 아이의 젖은 배를 닦자 검은 문자들이 지워지면서 아이의 살이 뱀 껍질처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진다 그때마다 아이는 물고기를 게우면서 울고 두 손은 고대 산술서처럼 낡아간다
새벽 4시, 내가 침실로 들어서자 내 침대에서 서기 660년경의 백제 필경사 노인이 내 잠옷을 입고 잠에서 깨어난다 내 손에 들린 빨간 물고기를 보더니 놀란다 그 천도복숭아, 어디서 났소?
나는 의자 너머 창밖을 가리킨다 암벽도 하늘도 온데간데없고 숲은 온통 칠흑의 뱀들로 가득 찬 복숭아밭이다 사라진 노인의 한 서린 울음이 차곡차곡 차올라 한 권의 불의 서책이 되고 있다
밤의 숲속 펜션이다 내가 잠든 사이 벗어놓은 옷들이 새가 되어 숲으로 날아가고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이 밤의 폭우는 누가 하는 기이한 낚시질일까 누가 또 내 메마른 꿈의 창을 두드린다
계간 『시인동네』 2016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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