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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여명 시인 / 햇볕우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2.

이여명 시인 / 햇볕우물*

 

 

해가 팔작지붕 위를 지나갈 때

집은 홑처마를 꽃잎처럼 벌려 햇볕 집어넣는다.

황토 안마당 달구어져 환해진다.

안방과 쪽방 마루 밑까지 햇볕이 넘실거린다.

향나무 굽어 있는 일곽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이는 바람

토담 넘고 행랑채 지나 흙벽 보듬어 내려온다.

하늘 구멍으로 빠져든 햇볕

격자문 창살 어루만지다 고즈넉이 눌러앉은 그늘과

안마루 검푸른 더께

걷어 올리며 생을 마감한다.

겨울철에는 국화 꽃잎 붙인 화전(花煎)처럼 얇다.

달이 처마 끝에 가끔 둥근 몸을 기대오면

암수막새 제 그림자를 당초문양으로 마당에 내려놓는다.

제삿날 저녁 잡귀 같은 연기가 서먹하게

우물천장으로 빠져나가며

늙은 종부의 한담(閑談)도 토해낸다.

입구ㅁ 자형 기와집 속 햇볕을 담는 우물,

처마와 처마 맞물려 만든 네모난 술병 같은 우물,

일가의 여인네들

댓돌에 앉아 하얀 버선발을 가지런히 헹구었던 우물,

한나절 은빛 햇살 가두는 우물이다.

 

시집 『말뚝』(시산맥, 2018) 중에서

 

 


 

 

이여명 시인 / 돌을 쪼다

 

 

돌을 쫀다 돌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여문 돌을 쫀다.

 

돌 속에는 거북이 살고 있다. 돌이 태어날 때부터 그 속에 들어앉아 있다. 석공의 눈에는 거북이가 보인다. 좌우로 훑어보며 먹 나누기를 한다.

 

망치 높이 들어 내려친다. 불필요한 부분 뭉텅뭉텅 잘라낸다. 목 아래 혹을 뗀다. 거북이 다치지 않게 돌을 쫀다.

 

나뭇결같이 돌에도 결이 있고 암수가 있는 법, 굵은 금과 잔금, 가로와 세로결 따라 정과 망치 고쳐 쥐고 탕, 탕, 탕 돌 가죽을 벗긴다. 망치는 정 꽁무니 치고 정 머리는 돌을 친다.

 

코와 눈 발라내고 발가락을 끄집어낸다. 16날, 24날 정으로 잘게 도드락다듬하고 마지막 날다듬한다.

 

거북이 드디어 허물 벗고 빠져나온다. 돌 속에는 탑이 있고 석등과 당간지주 불상이 있다. 사람도 돌 속에 들어 있다. 다만 그 껍데기를 깨지 못할 뿐이다.

 

시집 『말뚝』(시산맥, 2018) 중에서

 

 


 

 

이여명 시인 / 의자의 무릎

 

 

그때 기대어 주던 그 사람에게 그랬듯이

무릎 벌리고 내 엉덩이 받아들인다.

 

선 것도 완전히 앉은 것도 아닌

무릎에서

 

나의 체온이 그에게 가듯

그의 체온이 내게 온다.

내가 기다린 건 아닌데 그는 그대로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안락함 때론 딱딱한 것만 알았는데

언제부터 온기를 주고받았는지

오래 머물수록 따뜻하다.

 

내가 기대고 그가 기대오면

우린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몸 내밀어 준다.

 

그의 어깨를 잡고 일어서면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듯

그의 무릎 조금 부풀어 오른다.

 

또 다가올 사람 기다리는 듯 그는 그 자세로

나를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시집 『말뚝』(시산맥, 2018) 중에서

 

 


 

 

이여명 시인 / 화살나무와 과녁

 

 

땅은 모두의 과녁인가

붉은 보석의 갓등 켜고

화살나무 땅에 화살을 박고 흔들린다.

 

어느 곳 집 짓고 밥쌀을 안치고 군불 밀어 넣고

사슴, 새, 곤충과 풀들

사람도 땅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다.

 

무엇의 과녁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가

초식동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방 코르크질 날개를 달았다지 그 날개

귀신이 쓰는 화살 깃이라 귀전우(鬼箭羽)라 말하지

 

나도 살기 위해 위선과 허세로 부풀리지 않았던가

사람들, 사는 동안 몇 번 기회가 온다고 한다.

하나의 과녁과 몇 개 화살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

화살이 날아갈 때는 흔들리며

그리고 휘어지며 날아간다고 하지.

 

화살도 자신을 위해 떨며 돌며 좌우로 꿈틀거리고

시위는 오늬를 튕기고 오늬는 화살 밀며

앞으로 나아가 과녁 어디에 닿는 것이지

삶은 먼 허공 지나 포물선의 끝이 닿는

그 모나고 둥근 과녁을 바라보는 일인지 모른다.

 

이번에는 3중 다음번에는 몰기(沒技)하면서

가진 화살을 모두 탕진하는 것이다.

 

시집 『말뚝』(시산맥, 2018) 중에서

 

 


 

 

이여명 시인 / 말뚝

 

 

고삐를 당겼다. 팽팽하게 공중에 줄을 치며 외줄로 잡아당겼다. 말뚝은 말뚝대로 소는 소대로 잡아당겼다. 소가 한번 잡아당기면 말뚝도 한번 잡아당겼다. 소 힘만큼 말뚝에게도 힘이 있었다. 소가 바깥으로 끌어당기면 말뚝은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쪽에서 놓으면 저쪽에서도 놓았다. 서로 모르게 끌어당길 수는 없었다.

 

검게 박힌 말뚝으로부터 소는 달아날 수 없었다. 말뚝도 한 발 움직일 수 없었다. 서너 발 거리에서 말뚝은 소를 소는 말뚝을 바라보았다. 말뚝이 없으면 소 없고 소 없으면 말뚝 없었다. 이 말뚝에 소뿔때기를 오래 비빈 적 있었을 것이다. 그때 말뚝도 제 뿔때기를 소뿔때기에 비벼대었을 것이다. 소가 스스로 고삐를 맬 수 없듯 말뚝도 스스로 땅을 뚫지 못했다. 말뚝이 땅에 박혀 있지 않으면 말뚝이 아니었다.

 

200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이여명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0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말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