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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운진 시인 / 파란 달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3.

이운진 시인 / 파란 달

 

 

      기억을 허문다.

       

      내가 온갖 죄를 지은 저 아름다운 시절과

      돌림병 같던 청춘을 헐어서

      기억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하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처음 알던 백일홍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갓 핀 꽃송이가 먼저 알고 반겨도

      나는 처음인 듯 슬펐으면

       

      가장 어두운 눈 속에서

      가장 밝은 당신이 사라질 때

      한 날에서 다른 날로 옮겨가듯

      무심히 아팠으면

       

      얼굴이 없는 나를 만났을 때도

      밤보다 깊은 문장을 잃었을 때도

      눈만 가만히 감았다 뜬 채,

       

      지나간 시간을 허무는

      그런 밤에는

      눈물이 울다 간 자리에

      파란 달이 뜬다.

 

계간 『실천문학』 2017년 겨울호 발표

 


 

이운진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199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등과 , 에세이집 『고흐씨, 시 읽어 줄까요』, 청소년도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