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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리 시인 / 통뼈
틈이 자라 붕괴가 된다는 말, 믿지 않는다 뙤약볕 작열하는 언덕을 닮은 어머니의 등 언제나 모락모락 김이 서려 있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통뼈란 말이 떠오르곤 했다 통뼈란 거, 강단지고 당돌한 허우대를 떠올리겠지만 협심증으로 호흡이 짧은 어머니의 등은 물렁하지만 평평한 언덕이면서 비탈이었다 물집으로 굴곡이 진 능선에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난청이면서도 귀가 밝은 어머니는 어금니가 제일 먼저 빠졌다 얼마나 오래 이 악물고 버티셨기에 이리도 일찍 입 안에 허공 하나 키우셨을까 허공 속에 가득 찬 어둠이 굵은 마디가 되어 완강한 생의 단면은 골다공이 되었나 오지랖에 만개한 개망초 꽃처럼 다소곳한 어머니의 들녘엔 수많은 미로가 엉켜 있고 미로에서 뿌리가 무성한 고사목을 본다 제 몸을 뿌리에 내어주고 탯줄로 묶어 아무데나 꽂아도 가지를 뻗는 통뼈의 생명력 잎이 질 때마다 한 마디씩 뻗어가는 뿌리의 굴성, 집요한 인내란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임을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등, 늘 젖어 있어 젖을 날이 없는 몽돌처럼 반들반들한 마모된 면의 모서리처럼 살아도 그것이 복판이란 믿음, 틈이 자라면 통뼈가 된다는 말, 알 것 같았다
시집 『분홍잠』(시산맥, 2016) 중에서
김겨리 시인 / 사과를 깎는 각도
대기권으로 쏘아 올린 위성이 붉은 과육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 붉은 의태어를 해독하려고 중력을 벗겨내자 바깥을 꽉 움켜쥔 단내가 진동한다 끊어질 듯 말 듯 궤도를 벗는 행성의 허물은 외곽에 뿌리를 둔 껍질의 중심부
껍질이 벗겨질 때 잘린 향기는 제 뿌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집착이란 껍질이 움켜쥔 알맹이였다는 사실,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에는 또 다른 집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모든 것들은 깎아 내거나 깎이는 제각각의 방식이 있다 보름달을 그믐달로 깎기까지 어둠의 날은 얼마나 무뎌졌을까
칼날의 기울어진 각도와 방향에 따라 깎인 껍질의 운명이 바뀐다 안쪽을 향하면 먹기 위해 깎는 껍질, 바깥쪽을 향하면 도려내는 껍데기 안쪽을 향하는 날은 예각이라 향을 발라내지 않고 바깥쪽을 향하는 날은 둔각이라 깊은 흉터가 남는다 안쪽으로 깎아야 향과 맛을 유지할 수 있다
아직 깎이지 않은 영역과 깎여나간 경계에 칼날이 멈춰 있다 팽팽한 긴장이 더 예리하다 몸은 둔각으로 하되 칼날은 항상 예각을 지향할 것 사과꼭지에서 늙은 벼랑의 냄새가 나는 건 각도 없이 도려내야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집 『분홍잠』(시산맥, 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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