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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란 시인 / 주인공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6.

이정란 시인 / 주인공

ㅡ변주

 

 

그는 내 단막 희곡 ‘피아노’의 주인공

나는 작가이자 피아노 조율사.

 

피아노 수리할 망치 좀 빌려줘.

 

꿈결에 누군가 관통하듯 나를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공구 몇 개가 없어졌다.

 

# 나는 그녀의 단막 희곡의 주인공

아무도 듣지 못한 음을 찾기 위해

피아노 연습보다 건반으로 쓸 목재에 몰두해 있다.

 

그녀의 공구는 날렵하고 무게가 적당해 손목의 각도만 잘 조절하면 나무 다듬는 데 쓰임새가 좋다.

 

나는 골든베르크 변주 콘서트로 스타 피아니스트가 되어 희곡을 빛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가 경험하지 못한 음을 연주할 생각이다. 그러자면 새로 만든 건반을 조율해야 하고, 그녀의 픽션이 필요하다

 

# 연습을 게을리하는 그에게서 공구 빼앗을 생각에 빠져 있다. 강한 달빛을 연 순간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오래된 성당에서 250년 된 가구를 자르는 그를 발견했다. 가구의 침묵은 부조리한 인식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연륜이지만 의미 있는 입술이 되지는 못했다

 

몰래 그의 작업실까지 뒤쫓아 가보니 아, 신월 모양으로 휜 아름다운 피아노…… 그는 옷을 훨훨 벗어젖히더니 잘라온 가구 조각으로 건반을 만들어 피아노에 끼워 맞췄다. 나도 모르게 피아노로 다가가 건반을 눌렀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나를 유인한 듯 놀라지도 않는

 

# 그가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걷다. 크고 작은 구멍이 무수히 뚫린 거친 암석 앞에 멈춰 선다. 석양에서 떨어지는 붉은 비늘 조각과 한데 어울리는

 

멜로디를 갖고 있지 않은 소음

같은 음을 반복하고 있는 조울

끊임없이 방언을 지껄이는 반미치광이

가짜 음을 파는 거간꾼

전염병에 걸린 신성과 위악

 

그들이 일제히 입을 맞추었다. 귀에 들어오는 건 오직 하나의 음, 하나의 멜로디를 이루는 음의 아원자들을 그의 몸을 빌려 체험한 순간, 그를 내 작품 안에 가둬둘 명문이 사라졌다. 주인공을 잃어버리고

 

갈 곳은 단 한 곳

나는 내 작품 속으로 깊이 몸을 던졌다.

세계 바깥의 내 배역은 여기까지

 

# 버려진 희곡 속으로 뛰어든 그녀를 느낀다. 그녀는 아직 무음이다. 까만 투명이다. 건반들이 조금씩 삐걱이더니 저절로 조율이 되었다. 난 그녀 속으로 빨려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 없는 콘서트도 옳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8월호 발표

 


 

이정란 시인

1999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무의 기억력』, 『눈사람 라라』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