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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 시인 / 끼니
끼니 잇기가 쉬워져 쌀통이 비어도 걱정이 없다.
튀긴 통닭 한 마리 약속하면 마트에 가서 일 년 농사를 지어 오는 아들. 그 아들 입에는 오 킬로그램의 쌀을 한입에 털어 넣은 번지르르한 입술에 약속하지 않은 술 냄새가 풍긴다.
쌀이 이렇게 쉬운데 쌀농사를 놓지 못해 허리가 굽어가던 어머님.
쌀벌레 일었으면 새방아 찧어 줄 테니 버리지 말고 가져 오너라.
사방에 쌀이 널려 있고 끼니 걱정하던 어머님은 유월과 함께 가고 있다.
시집 『바라보다』(시산맥, 2018) 중에서
이숙희 시인 / 옥수수밭 옆집
사람들이 살아 간다를 말할 때 인간 외에 모든 것은 배제 된다. 양은그릇에 먹다 남은 비스켓을 두고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개미떼가 그릇을 덮고 있다. 끔찍함이 자식 등판을 빨고 있는 거머리 떼를 보는 것 같다.
천도쯤 끓인 물을 양은그릇에 핵폭탄 터트리듯 투하하고 온몸을 타고 오르는 스멀거림 때문에 수천의 생명을 죽이고 공포감에 살았다.
옥수수밭 촌집의 낭만은 죽임도 태연해야 살 수 있다.
시집 『옥수수밭 옆집』(시와소금, 2015) 중에서
이숙희 시인 / 담벼락
복숭아꽃 떨어지는 봄날 화전을 부치는 여자들 모습 분홍으로 칠해지고 있다.
ㄱ자로 지어진 스레트 지붕 문 열면 부엌, 문 열면 방 네 식구 살림살이 가난하다.
밤에 일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아버지 밥상 물려지는 소리와 함께 담벼락에 기대 고구마를 까먹고 소리 죽여 울고 채소를 다듬고
햇볕이 연탄 구실을 하고 잠자는 것도 교대로 하던 담벼락.
그 시절 담벼락이 치장을 하고 있다. 눈으로 좋아야 지켜지는 과거 아버지의 낮잠과 어머니의 밤잠 고단하던 시절이 치장되어지고 있다.
무크지『울산작가』 제25호(울산작가회의, 2018) 발표
이숙희 시인 / 서울살이
비단구두 사러 간 아들은 게임이 좋고 지하철이 좋고 카페가 좋다. 물이 젖지도 않는 종이에 싸여진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물 한 병 사러 24시 마트에 들른다.
가방을 멘 채 컵라면에 물을 붓는 아이의 뒤통수 위로 티브이 화면이 무심히 바뀐다.
보름달이 나타나고 담벼락에 나란히 세워놓은 깻단이 햇볕에 말라가고 있다.
밥알도 모르고 샘물도 모르고 땀 닦는 수건도 모르는 비단구두 사러 간 아들은 지문 닳은 손바닥으로 햇감자 포슬 거리는 손등을 쓰다듬으며 팔월에 오제 제사 때도 오제 뜨겁고 그리운 살맛을 기억해낸다.
2017년 소금시 앤솔로지 “살”/ 시와소금
이숙희 시인 / 시례 8반
시례 8반에서 이어지는 목전주 앞에 서면 더 진한 색으로 눈썹을 칠하고 싶다. 아이샤도우에 묻어나는 눈자위가 고운 나도 내 아버지가 시례 8반 사람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임술년 동짓달 초하룻날 용달차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가슴에 안으신 흑염소 잔등에 진물 나는 살갗을 묻고 아버진 그렇게 떠나셨다.
삭아져버린 아버지의 눈썹은 퍼머넨트한 내 머리칼과 노점상 카바이트 불빛 속에 살아 있고
오직 나는 눈꼽낀 어머니의 눈물만 추억할 뿐이다. 이제 용달차 운전석 옆자리의 사람은 내가 잊어도 좋을 사람 다시는 내 울안에 들이지 못할 사람
그러나 시례 8반에서 이어지는 목전주 앞에 서면 내 인조 눈썹보다 더 짙은 소외당한 사람들의 그것.
*. 시례 8반 : 경남 울산에 있는 나병환자촌을 말함
이숙희 시인 / 유년기 Ⅱ
*뻬뜨랑 – 어린 시절 우리가 불렀던 벙어리의 별명-
음악 감상실 「하오」를 나오면 햇살이 누워 있는 약지 손톱에 무색 메니큐어 같은 유년…… 무명실로 이마의 잔털을 뽑아내고 분내 나는 얼굴로 볼을 부비고 떠나버린 어머니를 향하여 날마다 눈물을 널어 보이던 나의 영토 안에 수화를 하는 그가 나타났다.
가슴에 망원경을 달고 모든 것의 속살 같은 몸짓으로 말보다 더 진한 눈빛으로 손을 잡아주던 나날이 위안 받던 나의 유배지.
망개나무 열매로 목걸이를 만들다 돌아보면 망원경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 산과 산 사이를 지나 바다를 보던 그의 뒷모습…… 노을 받으며 업혀서 내려오던 동네 어귀에 자치기를 하던 아이들 일제히 입을 모아 놀려댈 때 허무하게 내리 깔리는 그의 유일한 언어 뻬뜨랑….
삽짝이 긴 집안에서 앞치마를 두른 아내가 달려 나와 망원경을 받아 들자
목단이 피다 만 뜰 안에 피마자기름을 윤나게 바른 나의 어머니.
닳아져 버린 내 손금의 생명선이 한없이 이어진다.
이숙희 시인 / 누이의 봄. 1
우리 연년생으로 자라 평범한 어른으로 살 줄 알았다.
강 건너 쪽으로 시집간 누이는 아홉 가구 서민들의 방세 받으며 사는 홀어미와 수선화 꽃모가지 같은 허리통을 자랑 못하는 너를 마음만큼 넉넉히 챙기며 살지 못한다.
봄아 봄아 누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의 봄아 눈부셔 커튼을 치는 창을 떠나 손등에 백여개의 침을 꽂으러 가는 중앙선 남쪽 해안 선로를 따라 가라 신문지 둘둘 말아 겨드랑이에 낀 청년을 따라 가라 등뼈 뼈마디 속속 힘이 되어 남정네 힘줄 돋은 종아리로 대문을 넘어 설 때까지 홀어미 저녁상 수저가 휘어질 때까지 절대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이숙희 시인 / 반지
한때 사랑했다 하여 지금은 잊고 사는가 한낮 방문 잠그면 그대와 등 기대어 사는 꿈에 젖는다.
달래머리 같은 처녀 그대 애인이라 하지만 가족들 틈에서 고독하면 나른히 덮쳐 오는 나의 사랑이여
까탈 부려 소유하고 싶은 사람 추호도 아니지만 저울에 달아 보는 사랑법 홀로 익혀 동그란 약속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하라.
이숙희 시인 / 시인의 묘목
아들아 이야기 하나 하마 코 흘리면 사람 알아본다는 8개월의 너를 안고 옷소매 반짝이며 들소처럼 자란 아버지의 산마을을 찾아가면 마당 귀퉁이에 대추나무 눈터지는 아우성이 거름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 소리에 도둑맞고 있는 봄이다.
사람의 머리통에서 옥상의 물탱크만한 바퀴만 돌리다 퇴근하면 출발이 집이어서 돌아오는 곳도 집이어야 하는 풍향계 같은 일상 때문에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시인이 된다.
헬맷처럼 뼈만 남은 무릎 관절을 펴고 오므리고 삽질 하면 폭포수처럼 퍼부어 대는 춘곤증 사지를 벌리고 가장 짐승에 가까운 봄잠을 자고 나면 시인의 물독에 굵은 철사 줄로 테를 메워 놓은 시인의 아버지.
희뿌연 아파트 불빛의 계단을 시인의 등에 업혀 오르는 아들아 인생에 올라야 하는 곳이 많아 힘이 들면 나이테 그어 줄 아버지를 기억해 다오.
1986년 《한국여성시》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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