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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연 시인 / 시간의 기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5.

서정연 시인 / 시간의 기억

 

 

  아물지 않은 기억은 아프지 않다

  기억은 쉴 새 없이 흔들린다

  가까스로 버티며 살아내던 지난한 몸짓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듯 소스락거린다

  피리 소리를 기다리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켜켜이 삭였다고 믿고 싶었던

  망각의 시간을 불쑥불쑥 갉아 먹는다

  꼿꼿이 고개를 드는 기억을 분지르면

  기억은 단숨에 심장을 관통한다

  심장은 습습히 스며드는 기억에게

  제 몸을 뚫고 번지는 살모사의 침샘처럼

  한 번은 기어이 숨길을 내어주고야 말리라

  손목을 그어 줄에 목을 건 핏빛 꽃을 만나든지

  첫 연인처럼 쉬지 않고 속살대는 시간의 기억

 

  치명적인 독사의 눈깔보다 더 어지러운

  저 혓바닥

 

시집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 2016) 중에서

 

 


 

 

서정연 시인 / 전철 안

 

 

언제 만난 적 있었을까

 

전철 안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혹은 돌아오는 사람처럼

지치고 피곤하고 알맞게 따뜻하다

수다를 떨기도 때로는 옆 어깨에 닿을 듯 머리를 기대며 졸기에도 좋다

쫑알거리는 연인처럼 손이라도 잡을 듯 다정한 거리

어쩌다 살갗이 스치더라도 눈웃음마저 보낼 수 있다

옆 사람의 온기를 느끼면서 말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 표정 구경도 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한집 식구처럼 아늑함을 느낀다

안도하며 어디론가 함께 가고 있다

 

전철을 타면 외롭지 않다

 

시집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 2016) 중에서

 

 


 

서정연 시인

201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목련의 방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