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형민 시인 / 피아노 앞에 앉은 디오 양에게 쓰는 편지
나는 너의 연주가 흐르는 도에서 도 사이 풀어놓은 개 한 마리
너의 연주가 시작되면 나는 가만히 하얀 계단에 앉아 부르는 검은 네 이름. 너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가 닮았다고 생각하며 아무 계이름이나 떠올려보았어. 그러다 그 소리는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나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주곤 했지. 오랫동안 너를 바라보다가 너를 내 눈 저수지에 띄어놓고, 달 뜬 골방의 빈 종이 기름 바다 위에 붓으로 너를 상상하며 마구 더럽혔다. 너의 손목도 이미 기억의 구름에선 흐리고, 악보의 콩나물은 이미 자라 저 하늘 구름 밖으로 날아갔지,
너의 방에서 이복 오빠 에피가의 편지를 훔쳐본 적이 있어. 집안의 문턱이 높아서 피아노를 들일 수가 없었던 일들이 적혀 있었지. 너무나 숨이 턱 막히는 슬픈 일. 내가 머무는 이곳 또한 피아노 하나 들릴 공간도 없는 좁은 골방. 어느 날의 꿈 저 우주에서 건너온 너의 피아노 연주 소리는 천사가 물고 온 기쁜 소식. 천사가 물어다 준 손가락 지문 하나. 나는 죽은 목소리처럼 들리는 귀신통을 짊어지고 은하수 넘어가며 상여를 가다가… 잠에서 깬다. 나는 너를 최고의 악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등을 보인 네가 하얗게 질리도록 옆구리를 만지던 기억. 네가 fff를 어떻게 연주할지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세게 누를까. 주먹으로 쳐버릴지 고민하다가 끊어 먹은 줄의 개수 그리고 내가 목을 매달기를 포기했던 줄의 개수가 같다. 이건 도대체 어디에서 온 분노일까. 가끔 네가 나에게 말해주었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연주하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그런 의미로 너의 얼굴조차 흐릿하다. 우리는 눈을 감아도 그림이 되고 귀를 닫아도 음악이 될까. 네가 나에게 연주해준 노래들은 왜 기억의 저편 너머로 숨길 수 없는 것인지…
우리는 같은 악보를 본다 하더라도 이 세상엔 수많은 변주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항상 같은 곡을 연주한다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면서 진짜 쇼팽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가장 연주하기 힘든 연주기호는 RUBATO라 생각한다. 너는 카덴차에선 무엇을 연주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우리는 가지런히 피아노 덮개를 덮고 입술을 덮고… 우리는 피아노 뚜껑 속으로 옷가지를 잃어버리기로 했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나쁜 인연이야, 묵음 처리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웅장한 화음 앞에 서면 결합에 대해서 떠올리는 참 나쁜 취미들로, 나는 너를 무서워했지. 이런 엉망인 우리의 과거는 훌륭한 연주라고 생각한다. 나는 쇼팽의 왼손 연습곡을 연습할 때면 왼쪽 심장에서 피가 돈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이 피에 젖는지도 모르도록 건반 위는 피의 축제가 되도록 붉게 물들도록…
도에서 도를 향하는 옥타브의 거리에 사는 너에게
가끔은 어린 날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선 연주회에 관객석 사이로 그토록 찾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과연 그 사람이 엄마였을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피눈물 속에 사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네가 나를 향해 돌아보는 순간부터… 나는 너를 잊을 수 없다
마른 바닥을 핥는 개처럼 평생 한 음만 닦더라도
웹진 『시인광장』 2018년 6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도이 시인 / 썰물의 문장 외 1편 (0) | 2019.05.25 |
|---|---|
| 이희섭 시인 / 초록방정식 외 1편 (0) | 2019.05.25 |
| 김새하 시인 / 육식주의자를 위한 변명 (0) | 2019.05.25 |
| 김윤이 시인 / 통하다 (0) | 2019.05.25 |
| 구광렬 시인 / 나의 하늘을 위해(Para mi cielo) 외 1편 (0) | 2019.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