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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광렬 시인 / 나의 하늘을 위해(Para mi cielo)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5.

구광렬 시인 / 나의 하늘을 위해(Para mi cielo)

 

 

1.

더미를 헤치지 않고 먹이를 찾으려는 도둑고양이를 만나던 날, 소식은 불안하고… 소식은 안녕한데 내 이목이 불안하고 자목련꽃잎 같은 편지들은 날아들건만 반송이 두려워 답장을 못해주던 날,

 

수몰지역 같은 내 몸의 수분이 썰물로 썰려가고 마른 수초처럼 체모가 드러나고 내 서 있던 곳 사막이었음을 깨닫던 날,

 

해변카페 커피잔 바닥이 드러나고 눈동자에 머물던 필두화 몇 닢 다시 밀려올 파도를 위해 잔 속에 떨구어도 멀리 카푸치노 수평선, 180°를 잃던 날,

 

서까래에 못을 박다 아찔, 손가락을 치건만 몸의 행성 중 정 중앙의 별이 와르르 떨어 바싹 마른 나이테 사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공기 한 줌을 걸어 못대가리를 구부리던 날,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거리의 화가가 빈 도화지를 깔고선 생라면을 뜯던 해거름, 입천장이 벗겨질 줄 알면서도 팔팔 끓는 순대국을 단 몇 술에 넘겨버리던 날,

 

자주 가는 절의 절 개가 고무신 한 짝을 절 밖으로 물고 나가던 저녁, 입에 발가락을 집어넣고 공벌레처럼 핥던 날,

 

도수 높은 네 눈물로 무지개 열리고 갈매기 몽유했지만 아버지 초상날, 강물 같던 엄니 눈물에도 쉬 전염되질 못했던 내 슬픔으로 미안해하던 날,

 

‘살자살자살자’ 뇌까릴수록 자살로 들리건만 ‘자살자살자살’을 뇌까려 ‘살자’로 들리게 하던 날,

 

2.

우산을 접던 시절, 늑골까지 스며든 빗방울들이 바야흐로 지하실 포도주처럼 느껴지는 날,

 

어떤 이별에도 고갈되지 않을 것 같은 그 빗방울들, 철없이 좋았던 시절의 선물이었음을 느끼게 되는 날,

 

촉촉해진 알비노 눈알을 비비며 뇌신경외과 같은 건전이발소를 빠져나오면 고맙게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소시민을 위한 밤이 되는 날,

 

내려라, 내려라 모처럼 뚫린 내 심장이 폐광이 되지 않게 눈감고 기도하면, 언덕 너머 성당의 마리아상 속눈썹에도 사뿐 싸락눈이 쌓이는 날,

 

당장 죽더라도 연구실 서랍 속 자위를 위한 포르노 잡지, 꼬불쳐둔 적금통장이 걱정되지 않을 날, 이른 봄 마음의 묵정밭 위 건초를 걷어낼 시간, 그 조용한 3시간만 주어진다면 눈감을 수 있을 날,

 

 


 

 

구광렬 시인 / 시를 추억하는 짧은 산문

 

 

누군가 기원전(紀元前)의 말 한 마리를 몰고 와선 그를 싣고 떠나줬으면 했다. 도무지 부활의 희망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않던 그 성당의 예수 상, 아니 예수. 기쁜 날에도 그를 보면 슬퍼졌다. 복도를 지날 때면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이 하 애처로워 손발에 박힌 못이라도 빼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난, 그 성당을 오래 다녔다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는 예수보다 더 신(神) 같던 사제 때문이다.

 

쿠바 산 시가를 빨다가 위스키가 담긴 콜라 병을 들이키며 그가 한 말: 죄는 물론이고 벌 또한 인간의 짓이다. 신의 짓이 아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해줄 베드로 같은 신자는 못 뒀지만 히든카드를 들여다보는 그의 쪽 째진 눈망울에선 차라리 부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신부, 예수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지금까지 부활했다는 소문은 없다. 그럼에도 난, 계속 성당을 다녔다. 마리아보다 더 성모(聖母) 같던 수녀 때문이다. ‘형제님, 형제님’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내 어머니에 결핍됐던 살가움이 들어있었다.

 

내 나이 열아홉, 마침내 그녀를 사랑했다. 검은 수녀복은 총천연색으로 보이고 달력엔 성당 가는 날이 유난히도 빨갛게 칠해졌다. 하나 짝사랑이었다. 그녀, 나보다 예수, 아니 예수 상을 더 사랑했다. 날 보곤 웃었지만 그를 보곤 울었다.

 

지금 난, 듬뿍 얹힌 휘핑크림 너머 그 성당을 바라본다. 마당엔 여전히 석녀(石女) 마리아가 보이건만 복도엔 그가 있을까? 그 그림자 말이다. 회랑 끝까지 죽 늘어지던 검은 뿌리 같던, 도굴된 시체를 세워 놓은 듯해 다시 묻어주고 싶던.

 

아니, 그 또한 신이었을 거다. 신 없으면 기원후紀元後 인간이 신이 되려 드니까.

 

혼자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 그래서 난 이곳을 즐겨 찾는다. 그래, 그녀 또한 날 사랑했을지 모른다. 에스프레소의 쌉싸래함과 녹아드는 생크림의 단맛이 어우러지고 있잖아….

 

 


 

 

구광렬 시인

 

 

멕시코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공부(문학박사)한 뒤,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El Punto)》 및 《마른 잉크(La Tinta Seca)》에 시를, 멕시코국립대학교 출판부에서 시집 『빈 거울(El espejo vacío)』을 출판하고부터 중남미작가가 되었음. 국내에서는 오월문학상 수상과 함께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시집으로 『하늘보다 높은 땅: La tierra más alta que el cielo(멕시코 출판사 Eón 刊), 『팽팽한 줄 위를 걷기: Caminar sobre la cuerda tirante(우루구아이 출판사 aBrace 刊), 등 몇 권의 스페인어시집과 『슬프다 할 뻔했다』(문학과지성사 刊), 『불맛』(실천문학사 刊) 등 몇 권의 국내시집을 비롯해, 장편소설 『각하, 죽은 듯 살겠습니다.』(새움 刊),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새움 刊), 『반구대』(도서출판 작가 刊) 등과 산문집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실천문학사 刊), 『체의 녹색노트』(문학동네 刊), 번역서 『바람의 아르테미시아』(실천문학사 刊) 등 기타 문학관련 저서 30여권이 있음. 소설 『반구대』 시집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에세이집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등은 문광부가 지정하는 우수도서에 선정된 바 있음. 그중 소설 『반구대』는 2015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콘텐츠개발 지원 사업(규모 5억 원) 텍스트에 선정됨. 오월문학상, UNAM동인상, 멕시코 문협 특별상, 브라질 ALPAS ⅩⅩⅠ 라틴시인상 등을 수상. 산문집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이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 ‘2009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11년 대산문화재단번역지원과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창작지원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울산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주 동리목월문예창작대, 대구교대 등지에서 문예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