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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심 시인 / 단추
저 어둡고 사나운 계절을 건너가려면 부는 바람만큼 구부러져 소매끝동까지 단단히 채워야한다.
하얀 실 뿌리들이 나무의 생애를 지상에 묶어두듯 바람 부는 세상에서는 여미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당목실 한 꾸러미 다 풀리도록 단추의 멱살을 칭칭 옭아맨다.
떨어져 천 년을 흙 속에 묻혀도 움도 싹도 틔울 수 없는 플라스틱의 가려움 그러니 독하게 매달려 아침에서 저녁으로 끝없이 흔들려야할 뿐.
지난 시절의 불면도 치욕도 꼭꼭 잠그고 걸핏하면 쏟아지는 가슴 속 뜨거움마저 울을 치고 가두어야 이름 없는 새 한 마리라도 키울 수 있다. 새 봄이 오기까지 허허벌판 떨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추 뒤에서 누더기 진 마음은 한 겨울을 울다가 격정의 환한 난간을 만나 묵은 실밥 뜯어내고 주르르 꽃물로 흘러내릴까.
달이 떠서 싸늘한 하늘을 여미고 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이은심 시인 / 蘭
아프면 아프다고 할 것이지 노란 버즘이라도 시름시름 피우고 혓바닥 쩍쩍 단내라도 풍길 것이지 그러면 어때서 그러면 좀 어때서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고 쥐어박는 당신에게 입양된 후 나는 죽을 듯이 살았다.
가물거리는 깨금발로 키를 늘이고 손끝 저리도록 수다를 피웠다. 날마다 푸르게 웃기 위해 뒤가 마려워도 내색하지 않았다. 지나가면 툭툭 건드리기도 했던 안부를 눈까풀 파르르 떨며 하품이 잦던 체위를 끝내 사함 받지 못했고
당신 등 뒤의 무관심을 거름이라 생각해도 더 이상 초록을 견딜 수 없었다.
관음죽과 해피트리와 안시리움의 실내에서 드디어 반점이 돋았다. 모가지 똑똑 따내리는 통속이 어둠을 더듬어 왔다.
어차피 어떤 풍경도 시한부의 삶이므로
슬픔으로부터 돌아온 당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나의 반란을 저 문 밖으로 놓아주는 일이다.
쓸쓸하지만 나의 죽음은 타살로 기록될 것이다.
시집 『바닥의 권력』 ( 황금알, 2017) 중에서
이은심 시인 / 항상 저쪽이 환하다
꽃 피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꽃 지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두 마디째를 우는 새와도 관계없는 일이 내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저통의 수저들이 죄다 등을 보이고 서먹하게 이파리들이 다 뒤집어져 있어도 산 채로 꺾이는 일만 없다면 나무 한 그루만큼만 꿋꿋하게 살자 했다. 그대만 깊숙이 옮겨심고 들판처럼 멀리 나가자 했다.
내 쪽을 헐어서 내일 모레 조금씩 아프면 그만이었다.
문 밖에 세워두어도 슬픔의 주인은 변하지 않는 것 쓰라린 꽃에도 나비 날아드는 꿈이
내 사는 일의 치명적 낭비였다.
계간 『시와 인식』2009년 봄호 발표
이은심 시인 / 사람, 너무 긴 이름
닫힌 문은 꼭 두드려보고 싶어요.
써보지 못한 말들과 수제 초콜릿과 영수증이 공동관리하는 어느 날은 서랍을 가족이라 불러보기도 해요. 때로는 면도하는 그를 훔쳐보았는데 거울 속 깊은 곳으로부터 도무지 돌아오지 않고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피부의 물기를 닦고 보니 고양이 데드 마스크였어요.
밖에서 밖으로 돌다 눈꼬리가 처졌어요.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고 있는데 커튼이 울면서 발등까지 마구 내려와요.
세상에 혼자 올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불규칙하게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풀밭에서 자주 넘어지는 것은 내 수정체가 더러워진 탓이고 남이 닦아놓은 길을 반성 없이 걸어 다닌 때문인데 아직 남은 슬픔을 주고받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그토록 기다렸던 얼굴을 밤의 서랍 속에 넣어두었어요.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눈동자를 마저 지워도 되겠지요.
그의 이름은 너무 길어요. 마음이 기운 독방에서 아직 다 부르지 못했는데 그는 점점 많아져요. 마침내 소홀해지고 마침내 무심해질 수 있도록
시집 『바닥의 권력』 ( 황금알, 2017 중에서
이은심 시인 / 하느님의 세탁소
어떤 아름다운 저녁에 나는 세탁소에 간다. 세상의 더러움을 보다 못해 하느님이 차려놓은 세탁소에 하루 만에 더러워진 실크 블라우스 그 부패의 물증을 맡기러 간다. 늘 공사 중인 골목 입구에서 몸이 스멀거리는 것은 파헤쳐진 양심 때문이다. 선들바람에 슬쩍 곁을 주는 실루엣이나 속없는 통정에 살을 대고 하르르 피어나는 장미꽃 무늬나 곰곰 들여다보면 그게 다 감쪽같이 묻어버린 상처인데 새삼스레 높다란 횃대에서 건들거리며 속을 까발려 보이는 얼룩들.
얼마 전 몸을 푼 주인 여자는 아기를 업고 골목을 서성인다. 갓난아기의 얼굴엔 접힌 자국 하나 없고 주름이 두세 개 잘못 잡힌 내 옷은 시시각각 따로 노는 마음 탓이라는 걸 알겠다. 여자는 고분고분 피어있는 영산홍에 물을 주고 나는 철따라 꽃피운 죄악 한 벌을 맡긴다.
작은 골목에 감추어 두어도 하느님의 세탁소는 점점 번성중이고 어떤 이가 달을 표백제에 담그어 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는 저녁 여벌이 없는 사랑은 맡기지도 못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꿈 없는 잠을 잔다.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2004) 중에서
이은심 시인 / 산책의 범위
저물녘의 말이란 가장 느린 보행. 당신이나 나나 푸르러지자는 산책은 쉬어야할 의자가 상상보다 멀리 있다는 말.
서쪽으로 먼저 걸어간 당신에게 연두를 연두라고 말하지 못한 건 이곳은 곧 저곳이 되는 까닭이었다.
챙만 남은 모자를 쓰고 입술이 지워진 마스크를 쓰고 누군가의 부름에 답하는 개의 표정을 목줄처럼 죄어본 나의 거짓엔 실수가 없고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때 혼자 서있기 위하여 단지 무엇인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기 위하여 오래라는 말이 사라졌을 때처럼 나는 한 쪽 굽만 닳은 팔짱을 풀었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시큼한 땀 냄새마저 어둠 속에 빠른 걸음으로 묻어버리고 쩍쩍 갈라지다 혼자가 된 강의 이면에서 이미 엎질러진 후회란 다음 물굽이에 닿아보지 않았다는 말.
오늘을 함부로 밟은 풀밭으로부터 내일 하려고 했던 말까지는 빙 둘러 켜놓은 얼굴을 부랑이라는 음절의 둘레처럼 천천히 걷는 길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관계라고 당신은 빈손을 내밀었고 나는 끝이 뻔히 보이는 관계라고 찬 손을 돌려주었던 몇 일.
너무 좋아하면 강을 건너가 버리는 당신은 한 쪽 날개가 새파랗게 젖어 있었고 떼어내도 어쩔 수 없이 궂은 날씨가 예고되어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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