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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라 시인 / 사계(似界)
여름
부탁이야 내게 금지된 품목을 가져다 줘. 미지근한 물에 담가놓은 듯 잘 익은 머루눈을 가진 남자. 멈춘 공기 속 혀와 살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남자를
겨울
눈꺼풀에 바세린을 바른다. 바세린은 안티푸라민과 따뜻한 밥풀 사이에 살아서 착하고 흐린 식물.
가느다란 별빛처럼 무를 채썰어 먹었다. 남은 무를 잘게 다져 뿌리던 너는 비가 눈이 되는 아픔은 칼날에 달려 있다는 말을 내내 아껴 두었다. 숫돌에 갈 때가 지난 하늘이 검푸른 칼등을 보이며 물러나고 있었다. 눈꺼풀에 바세린을 바른다. 젖은 눈꼽이 가생이로 밀려나고
이 밤의 어둠이라도 우겨넣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와서
그날 너의 손을 놓아야 했다. 들린 홑이불처럼 분명하고 네 귀가 반듯한 그날
봄
나는 결정적으로 들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립스틱 바르는데 한 무리의 사람이 탔고 모두 꺼내 들었다. 화약가루 피어오르는 립스틱
가을
거울의 등을 두들긴다. 뱀이 토해낸 듯 귀때기가 빨갛고 온몸이 독에 불은 새가 튀어 나와 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가생이에 운다. 가을은 거울에 손을 넣어 더 많은 새를 꺼낼 수 있어서 인간과는 다른 계절 수없이 반복되는 음악이 텅 빈 제 몸을 만지는 순간 비가 온다.
이런 날 너는 판이 튀듯 오래 반복되는 음색 어쩌면 바닥에 닿아 빗물이 튄다. 물 튀김이 희미하게 퍼진다. 퍼져서 복사뼈로 밀려든다. 너는 속삭인다. 비둘기가 비보다 먼저 떨어져
너는 다음 말을 찾는다 너는 무슨 말로 이어야 하나. 독니를 붙들어 줘 거울이 멈출 수 있게
거울의 앞면은 끊긴 물 흐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물 가을은 악어에서 나무껍질까지 매끈하게 비춰 주고 네가 손뼘으로 나의 우는 뺨을 재는 동안
어쩌면 단풍은 밤새 어둠의 불티를 뒤적이는 중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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