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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철로변 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6.

김상미 시인 / 철로변 집

 

 

기차가 지나가네요, 내 애인은 철로변 집에 살아요,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집과 똑같은 집, 그 집에서 살아요, 우리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랑을 나누어요, 기차 바퀴 소리에 놀라 들썩이는 야생 민들레 꽃밭 사이로 날아다니는 자디잔 흰구름은 정말 황홀해요, 나는 황홀한 게 좋아요, 황홀할 땐 어떤 나쁜 생각도 깃들지 못하거든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민들레 씨의 아름다움은 내 애인만큼이나 정말 착해요, 매 시간 지나가는 기차처럼 우리 삶에는 머묾보다 떠남이 더 많고, 매번 불타는 그 떠남 속에서 나는 늙어가지만, 나는 내 위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좋아요, 마음이 저리도록 나를 꼭 껴안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푹 파묻히게 하는 내 애인처럼, 삶은 격렬하고 또한 한없이 적막하지만,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인생은 짧아지고 숨 막히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세상에서 멀어져 가지만, 매번 다시 오고 가는 기차소리는 정말 황홀해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두 줄로 끝없이 이어진 철로, 내 애인은 철로변 집에 살아요, 내 키보다 큰 야생 민들레꽃들이 서로를 덮쳐 내뿜는 쓰라린 망각 속에 황홀하게 피고 지는,

 

계간 『시작』 2017년 겨울호 발표

 

 


 

 

김상미 시인 / 어제의 창문

 

 

나는 어제의 사람.

어제의 여자, 어제의 사랑.

모든 내일의 그림들을 끌어 모아

어제의 벽에 붙이는 사람.

언제나 어제 속에만 기거하는 사람.

함께 노는 사람들도, 시도, 음악도, 놀이터도, 책도

모든 게 다 어제의 것들뿐.

아무리 오늘의 태양 아래 나를 발가벗겨 세워 놓아도

나를 태우는 건 오늘의 태양이 아니라 어제의 남은 빛들.

어제의 꿈, 어제의 이야기들.

 

나는 내일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피투성이 암흑 속을 걷고 또 걸어

오늘의 수돗물에 피 묻은 몸을 씻고

어제의 꿈들로 내 몸을 소독하는 사람.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내일의 열렬한 정사(情事)에도

오늘 불붙어 타오르는 열정에도

누군가의 뜨겁고 지독한 훈수에도 상관없이

묵묵히 피투성이 암흑 속을 걷고 또 걸어서 어제로 가는 사람.

가고 또 가도 그 길이 그 길이고

세상 최악의 불청객인 내일의 빛들이

불타는 내 희망 속에 숨죽인 꿈들을 산산조각 내어도

 

나는 그냥 어제처럼 왈츠나 추며

쓰러진 자들은 손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목마른 자들에겐 내 피를 마시게 해주고

벌벌 떠는 자들에겐 내 외투를 벗어주고

길 잃은 자들에겐 친절한 길을 가리켜주며

 

계속되는 4분의 3박자의 그 리듬 속에서

그 리듬이 열어 보이는 새 봄과 푸른 꽃으로 뒤덮인 초원과

목숨이 아홉 개인 길고양이들이 몇 백 년 된 탄식의 나무 위에서

한껏 몸 부풀리며 밟는 그 스텝 속에서

어제의, 어제의, 어제의 숙녀들처럼 환히 웃는 사람.

 

내일의 피투성이 문명은 죽은 자들의 뼈 위에서 끊임없이 세워질 테고

오늘의 피투성이 사랑은 그것을 토해낸 자들의 입술 위에서 다시 태어날 테니

나는 그저 어제의 리듬대로 왈츠나 추며

검은 시간의 유리잔 안에 들어 있는 죄 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날마다 ‘내일’이라는 환상을 퍼 올리다 주저앉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걸 바라보는 사람.

 

어차피 내일이란 뼛속까지 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그들과 상관없이 나는 어제로 가는 사람.

언제나 가파른 어제의 층계를 오르내리며

이 세상 모든 지나간 꿈들을 모아 왈츠나 추는 사람.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내일의 비명들이

가차 없이 닫아버린 어제의 창문.

 

계간 『시와 사람』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상미 시인 / 시인앨범 7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

그 시를 읽으면 모두가 죽어버리는 시를 쓰고 싶다.

아니다, 모두가 다 읽는 시를 쓰고 싶다.

그 시를 읽으면 죽어가던 것들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를 쓰고 싶다.

 

꿈같은 일이다.

 

아무리 좋은 시에 앙심을 품고, 주먹을 쥐고, 간절히 갈구하며

훔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굴려도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그런 시를 쓰지 못하고

이 시도 저 시도 다 쓰레기 같아

활활 타오르는 시어들의 모닥불 속에 모두 던져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둘러줄 게 시밖에 없어

뜬구름 잡듯 또 다시 펜을 집어 든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큰소리치며 인습을 뛰어넘듯 용감하게

있는 대로 생식기를 발기시키면서

 

허기지고 굶주린 시 속으로

미치고 미친 시 속으로

미치고 미쳐 꺼꾸러질 때까지

꺼꾸러져 희디흰 뼛가루가 되어

폭풍 속의 꽃가루처럼

훨훨 한 편의 시로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격월간 『현대시학』 2018년 9~10월호 발표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외 8편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와 『검은, 소나기떼』, 사랑시 모음집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