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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명희 시인 / 황금동전이 쌓이는 의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5.

한명희 시인 / 황금동전이 쌓이는 의자

 

 

괴테가 앉았던 이 의자 섹스피어가 앉았던 이 의자를 내어드리지요

카프카가 앉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앉았던 이 의자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눈 좋은 목수가 동굴에서 해저에서 꿈속에서 나무를 골라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후예들이 의자에 돋을새김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자식들이 의자를 지켰습니다

 

당신들이 몰려오자 이 의자가 황금빛으로 물드는군요

 

좋습니다 내어드리지요 의자 위에 황금동전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달려오자 영문 모르는 사람들조차 뛰기 시작합니다

 

의자가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를 복제합니다 의자가 늘어납니다 황금동전이 그득그득 쌓입니다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이 의자를 보들레르가 앉았고 두보도 앉았고 백석도 앉았던 이 의자를 당신들께 내어드리겠습니다

 

계간 『시작』 2008년 여름호 발표

 

 


 

 

한명희 시인 / 두 번 쓸쓸한 전화

 

 

  시 안 써도 좋으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카의 첫돌을 알리는

  동생의 전화도

 

  내 우울이, 내 칩거가, 내 불면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자꾸만 뾰쪽뽀쬭해지는 나를 어쩔 수 없고

  일어서자 일어서자 하면서도 자꾸만 주저앉는 나를 어쩔 수 없는데

 

  미혼, 실업,

  버스 운전사에게 내어버린 신경질,

  세 번이나 연기한 약속,

  냉장고 속 썩어가는 김치,

  오후 다섯 시의 두통,

  햇빛이 드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쓰여진 일기장,

 

  이 모든 것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

  한번도 당당히 시인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시

  그 시, 때문이겠는가

 

시집 『두 번 쓸쓸한 전화』(천년의시작, 2002) 중에서

 

 


 

한명희 시인

대구에서 출생. 서울 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받음. 1992년 《시와시학》에 〈시집읽기〉등 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시집 읽기』(시와시학사, 1996)와 『두 번 쓸쓸한 전화』(천년의시작, 2002),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세계사, 2005) 등이 있음.  2003년 시와 시학사 '젊은 시인상' 수상. 현재 강원대 교수이며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