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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기 시인 /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5.

김승기 시인 /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당신이 지나고 있네

  풀잎을 밟으시면 풀잎 소리로

  대밭을 밟으시면 댓잎 소리로

  저기 당신이 지나고 있네

  그 언젠가 당신이 나를 지나가실 때

  으스러지게 당신을 껴안았더니

  너무나도 어지럽던 그 밤

  끝내 긴 울음으로 당신을 배워

  당신이, 내 여름을 지나가시면

  까끌까끌한 볏잎 소리로

  내 가을을 지나가시면

  누런 벌판의 그 술렁거림으로

  눈감고 가만히

  당신이 지나가시는 소리

  오늘은 내 창 흔들어 지나가시기에

  온 등(燈) 밝혀 가난한 밤을 맞으니

  내 가슴, 당신 지나가는 소리

  당신 가슴, 내 지나가는 소리

 

시집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리토피아,2006) 중에서

 

 


 

 

김승기 시인 / 역(驛)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

  한 세월 그냥 버티다보면

  덩달아 뿌리 내려

  나무가 될 줄 알았다

  기적이 운다

  꿈속까지 따라와 서성댄다

  세상은 다시 모두 역일뿐이다

  희미한 불빛 아래

  비켜가는 차창을 바라보다가

  가파른 속도에 지친 눈길

  겨우 기댄다

  잎사귀 하나

  기어이 또

  가지를 놓는다

 

시집 『역驛 』(2011, 북인) 중에서

 

 


 

김승기 시인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리토피아,2003)와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리토피아,2006), 『역驛 』(2011, 북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현대시학,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