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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희원 시인 / 코끼리 무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5.

이희원 시인 / 코끼리 무덤

 

 

  너도 모르겠지만 말의 무덤을 본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말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다고 믿었다

  조분석으로 이루어진 안데스산맥 너머

  작은 섬들이 있다는 그곳,

  그곳에 가면 시詩들이 상아처럼 반짝이고 누웠을까?

 

  너도 모르겠지만

  쉰이란 나이는 말의 관절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신발장 구두엔 민들레가 핀다.

 

  코트디부아르로 가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오랑의 카페에서 카뮈를 만나는 것이고

  하나는 이스파한에서 세헤라자데를 만나는 것이다.

 

  너도 모르겠지만

  말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이 가끔은 있다.

  말의 뼈들이 촛불로 타오르는 곳,

  말의 창과 방패가 피 흘리며 죽어 가는 곳

  그곳이 말의 무덤이 아닐까?

 

  내가 지금 가려 하는 코트디부아르는

  15세기 상아 사냥꾼들이 만든 말의 무덤인가

  코끼리는 자기 집에서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다만, 편안히 죽어갈 뿐이다.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로맹가리의 소설제목에서

 

시집 『코끼리 무덤』(작가세계, 2015) 중에서

 

 


 

 

이희원 시인 / 마방(馬房)

 

 

당신의 감기는 눈썹을 위해 그쯤에서 성을 쌓았을까, 끝없는 지평을 달려 계절을 앞질러 왔다. 카이뻥에서부터 내리던 눈이 콘냐까지 쫓아왔다. 당신과 나는 한번도 방울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달빛을 잡아다 책상 위에 걸었다. 그림자가 지나가듯 네가 다녀갔다. 너를 붙잡기 위해 밤을 밝히던 날들이었다. 어딘가에 세상을 걸기엔 청춘이 아깝다고 느끼던 날들이었다. 저만치서 코웃음을 치면서 네가 지나갔다.

 

소금과 여물은 풍요로웠다. 발굽 아래론 융단 같은 밀집이 지친 다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달은 마방에서 떠서 마방에서 졌다. 마방은 모든 것들을 포용했다. 우리의 죄악까지도

 

우리의 식탁은 늘 풍요했다. 메르지멕초르바 숲과 바케트는 그득했고 양피지는 두루마리로 감겨 있었다. 붓들은 당신이 어서 와 붙잡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은 개나 물어가라지, 은촛대가 하얗게 밤을 밝히고 있었다.

 

나귀의 방울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갈퀴를 고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황제는 빨리 떠날 것을 명했다. 시간이 돈이 되던 시대가 왔다. 어차피 당신은 떠나야 한다. 그랜드바자르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광야를 달리던 바람이었을까, 아니 한 천 년쯤 눈 덮인 천산을 오르내리던 바람이었을까 바람은 가끔 마방을 기웃거렸다. 잠시나마 너를 가둘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너는 빗소리를 따라 총총 떠나갔다.

 

말똥 냄새가 마방을 넘는다. 떠나면서 벌써 그립다. 마방은 문을 열었다 닫을 뿐, 당신을 영원히 가두지는 못한다. 마방을 나서면서 처음, 당신이라는 마방을 생각했다. 아니, 당신의 이름 뒤에 묻어나는 슬픔을 생각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댔다.

 

밀밭의 하늘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신이 빗소리를 따라 흩어질 때, 나는 밭고랑을 뛰며 쓰러지는 밀대를 세우고 있었다. 콘냐의 밀밭은 하늘만큼 넓었다. 내 입술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바자르는 실크로드 끝에 실제로 존재했다. 그곳에서 기다릴 황금과 계집에 대한 꿈으로 마바리꾼들은 가슴마다 체리를 붉게 피우고 있었다. 마라마라 해협을 건너면 그곳까지는 불과 하루꺼리다.

 

접신의 기억은 멀다. 언젠가 콘냐의 마방에서 만났을 마바리꾼에 대한 기억처럼,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 세재의 주막에서 당신에게 고작 편지 한 줄을 띄운다.

 

시집 『코끼리 무덤』(작가세계, 2015) 중에서

 

 


 

이희원 시인

2007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코끼리 무덤』(작가세계, 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