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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연 시인 / 등대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5.

서정연 시인 / 등대

 

 

스모키 화장을 한 여자가 등대에 앉아 있다. 달이 해를 가려 달그림자가 드리운다. 눈썹 사이로 검은 달을 본다. 한번 감았다 뜨자 눈썹이 찰칵 닫혔다 열리면서 검은 달빛을 지나간다. 문득 밤이 된다. 달그림자 바깥은 낮이라 아직은 칠흑 같은 밤은 아니다. 빛이 없어서 더 많은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달을 맨눈으로 보았다가는 글썽거리는 심연으로 추락할 것이다. 글썽거린다는 것은 처음이라는 슬픈 이름이다.

 

등대에 걸터앉아서 두 발을 모아 그네를 탄다. 발뒤꿈치를 맞부딪치자 그네를 밀던 가락이 몸을 타고 흐른다. 몸을 관통하는 깊고 낮은 가락은 글썽거리는 소리를 더듬는다. 소리는 한 번도 호명되지 않은 이름이다. 꽃씨처럼 까맣게 깊은 잠을 자던 소리 슬픈 이름들이 쏟아진다.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고 복사뼈를 물고 오금을 매만지고 배꼽을 쓰다듬고 가슴팍을 건넌다.

 

스모키 화장을 한 글썽거리는 나는 벼락을 맞는다. 정수리에 불꽃이 일고 머리카락이 활활 탄다. 노랗게 타들어가는 머리카락에서는 파도 소리가 배인 유채꽃 냄새가 난다. 돛단배 한 척 바다에 떠 있다. 불꽃은 미지의 어둠 속으로 항해의 돛을 펼친다. 검은 달이 비껴가는 사이 태양은 걸어 나오고 나는 나에게 말해준다. 뛰어내려, 곁이니까, 전속력으로 달려와 유리창에 부딪치는 새처럼 나는 불시착한다, 아무 상처 없이

 

계간 『창작 21』 2018년 봄호 발표

 

 


 

서정연 시인

201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 201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