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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수 시인 / 흑점
저녁의 위벽에 쓰여 있는 축문은 손바닥으로 흩어야만 읽어 내려 갈 수 있다.
죽은 자를 위하여
한바닥씩 써내려간 문장은 깊게 패인 불화와 던져 없어진 기도였다. 돌아보는 것만으로 시차를 바꾼 음식들에게 아직 먹을 것이 있다는데 감사하다.
저녁은 부모들도 모르는 국적으로 꽃의 수레와 순례자의 행렬로 함께 걷는 것이다.
문득 내 행적이 누군가에게 꽂힌 암전이었나 천변에 핀 꽃들에게서 화살촉을 보았다.
난치성 우울증을 앓고 있는 슬픔의 심부에서 목을 조였을 화살들 촉끝에 깊이 박혀 붉게 물든 꽃들.
붉은색을 마주하면 돌아와 준 슬픔들이 다정하다.
나는 지금 죽은 자들이 가득 찬 사과의 껍질을 깎고 있다.
계간 『시와 사상』 2018년 여름호 발표
박병수 시인 / 짐승과 연못
짐승이 우는 것을 보았다 가끔씩 뒤척이는 연못의 배를 갈라 똬리 튼 짐승을 꺼냈을 때 이 기다란 짐승은 배수로가 없는 연못이 키운 슬픔이란 걸 알았다
짐승의 정수리를 후려친다 허공에 날려 보낸다 배를 가른 연못은 가만히 펴서 눕힌다 불빛조차도 없는 곳에서 연못은 뜨거웠다
짐승만은 날려야한다며 길어지는 왼손은 언제 보아도 기형이다 연못은 발을 담근 그늘을 수면 아래로 당기고 있다
하늘은 생목보다 무거운 색깔의 실을 날려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
항문 없는 짐승이 연못의 바닥인 듯 서럽게 운다 똬리를 튼 짐승 하나가 하늘을 비집어서 제 몸을 끼워 넣는다 짐승의 목을 치듯 더 자란 돌멩이를 연못에다 던진다
방금 태어난 이 짐승은 꼬리까지만 연못이다
계간 『다시올』 2018년 봄호 발표
박병수 시인 / 신을 드립니다
신은 유리병에 우물을 불어넣는 입을 가지고 태어났다. 신은 자기의 외모가 안락의자를 닮지 않음을 한탄하여 마을의 입구마다 우물을 꺼내놓았다. 바람은 자연에게 필요한 씨앗을 품고 떠났으므로 높은 산을 원망했다. 다른 식품보다 오래 보관되지 않는 가축을 버리고 사람을 선택한 그는 산발한 발가락을 끌며 자신이 두 번 죽은 자리마다 붉은 씨앗을 묻었다. 마른 우물가에서 가계도를 펼쳐보면 나의 신은 천 년 전에 태어났고 긴 세월 동안 그의 신은 열 번 태어나고 한번 죽었다. 텅 빈 우물에 안락의자가 무슨 소용인가. 방황은 열 개의 우물이 모여 저녁이 되는 것 우물은 신이 걸친 모든 입술을 이롭게 하는 것 우물이 모이자 마을사람은 야위어지기 시작했다. 피와 살이 없어 놀란 신의 식탁에는 신을 깔고 앉은 사람과 충분한 젓가락이 놓여있지 않았다. 신은 유리병에 떠오르는 자기를 들쳐 메고 그의 신이 가리키는 우물 속으로 걸어간다. 신은 내민 손가락이 마을의 입구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계간 『다시올』 2018년 봄호 발표
박병수 시인 / 이주자의 달
섬긴 신을 내려놓고 달을 걷고 또 걸었다.
달의 표면에는 버려진 것들이 타고내린 흔적이 허물어진 구덩이로 남아 있었다.
무리를 사람으로 이끈 자궁처럼
풀 한 포기 없는 곳의 그늘들이 구덩이를 구르며 몸을 말리는 동안 어둠이 태워버린 동굴의 울음이 망자의 신만을 데리고 돌아갔다.
신을 섬기는 일은 신이 되는 것보다 어려웠다.
'달이 황도를 지날 테니 삭일이다'
여인들은 가지런히 이주자를 꺼내놓고 가장 오랜 눈물을 받쳐 들고 동굴 벽과 바닥으로 굳어간다.
천구를 헤맨 달은 오후에 질 것이다.
달은 말리기 위해 엎어놓은 이주자들의 구덩이
한생을 돌아보는 이주자여 몸은 절반이 죽어 어둠에 뿌렸으니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란 뼈는 석양을 부린 후에 빈손이다.
망자는 비춘 달빛이 마지막 신이었다.
달은 흑백의 두 색깔로 녹이 슬어 밤이 되면 아름다운 구덩이였다.
계간 『사이펀』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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