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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어느덧 나는 시를
어느덧 나는 詩를 잃어버린 듯하다. 놀라지도 감동받지도 않는다. 한때는 그것이, 내가 너무 읽었거나 눈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다시 지금, 아픈 몸을 이끌고 볕 아래 바람을 천천히 흔들고 있는 화분의 잎사귀를 바라보며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봄날 오후 나는 시를 잃은 것이다.
처음 만난, 최초로 만났던 그녀를 잃어버리듯이 내가 너를 수줍게 만났을 때 너는 행간 속 넓은 페이지처럼 하얀 티셔츠에 아름다운 글자의 배열 같은 긴 머리카락 뜨겁게 달궈진 불덩이들을 초여름밤 바람 속으로 흩날리고 있었지.
얕은 땀방울 속 침묵의 향들이 은은하게 맴돌고 작은 몸짓과 눈짓, 난생처음 느끼던 순수한 운명, 눈동자, 서정적인 우연 그 옆모습에 나는 한없이 슬펐고 크게 매순간 감동받았었다.
시집은 무수히 하루하루의 먼지처럼 쌓이고 이미 지나간 것들은 달력처럼 다시 읽어도 나는 그것들에게 밑줄을 긋지 않는다. 내 옆에 있으나 나는 시를 잃어버렸고 너의 처음 얼굴이 지금 곁에서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그건 네 형상을 잃은 것이 아니라 너를 처음 보았던 나를 잃어버린 것일 게다.
시여, 네가 사라진 게 아니라 무수한 밤하늘 별들이 내 머리 위 캄캄한 공중으로부터 영원히 느리게 도달하듯이 그것을 기다리진 못한 내가 이승의 유한함처럼 점점이 사라져버린 것일 게다.
언제나 곁에 있는데 곧잘 감동하던 나여 어느 길로 소멸하였는가. 너는 옆에 있는데 어느덧 시는 나를 오래도록 잃어버리고 영원한 애인은 지난 날카로운 밑줄에 손이 베인 채 몇 만 광년의 유성처럼 영영 나를 찾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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