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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개미 시인 / 인형을 위한 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7.

김개미 시인 / 인형을 위한 시

 

 

  오후에 왔던 손님 때문이니?

  무서워하지 마

  얼음 같은 사람도 있어

  그는 단지 차갑기 때문에

  커 보이는 거야

  상처 받은 날도 웃을 일은 있어야 해

  자기가 코 고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는 할머니를 떠올려보렴

  도무지 실수를 모르는 삼촌의 실수가

  실수를 모른다는 사실이란 사실을 생각해 보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꿈속으로 못 들어오는 괴물도 있어

  너는 항상 어린애

  푸른 고양이와

  어린 엄마가 곁에 있잖니

  그럼그럼,

  할머니도 삼촌도 똑같아

  너처럼 꼼짝 않고 뒤척여

  모두들 같이 이곳에 혼자 살면서

  저곳의 공기로 숨 쉬어

 

 계간 『시와 세계』 2017년 가을호 발표

 

 


 

 

김개미 시인 / 꿈이니까

 

 

  꿈을 꾸는 게 좋아

  꿈속의 나는 거울 속의 나와 달라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부모라서

  나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아

  가짜라서, 사랑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꿈을 꾸는 게 좋아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

  일이 잘 안 돼도 울지 않아

  여기 이 시간 이 나라가 아니라서 좋아

  신처럼 공중에 떠서

  세상을 내려다보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 없어

 

  꿈을 꾸는 게 좋아

  집이 활활 타도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면

  꽃을 가꾸는 엄마가 있어

  귀신에게 잡아먹혀도 죽지 않고

  빨간 자두를 치마폭 가득 담아

 

  꿈을 꾸는 게 좋아

  물이 펄펄 끓는 솥에

  아빠를 밀어 넣고 솥뚜껑을 닫아도

  진짜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가짜 아빠가 술을 마시고 진짜 아빠가 되면

  새로운 가짜 아빠가 내 앞에 나타나

 

월간 『현대문학』 2018년 2월호 발표

 

 


 

 

김개미 시인 / 땅속의 방

 

 

별빛은 왜 날카로운가.

달은 자귀나무 그림자를 어디에 쌓아두는가.

 

모래 알갱이가 떨어진다. 벽지 안 시멘트 벽을 긁어내린다. 검게 빛나는 벽. 곰팡이 냄새와 습기. 똑똑. 물방울이 떨어진다. 입을 찧고 죽어간다. 어둠 속에 몸을 빠뜨린 고양이가 소리를 끌고 간다. 창틀에 끼워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신경을 찔러댄다.

 

더는 듣지 않을 거야,

더는 믿지 않을 거야,

가진 거라곤 급소뿐이라는 말,

소리에도 베인다는 말,

 

누가 어둠 속에서 눈을 뒤집는가. 누가 쇠막대기를 끌고 자정을 지나는가.

 

시집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2017, 문학동네) 중에서

 

 


 

 

김개미 시인 / 참나무 아래 누워

 

  

  찡그리지 마

  흙이 얼마나 부드러운데…….

  자고 일어나면

  참나무 뿌리가 내 머리통을 휘감고 있을 거야

  얼마나 편안할까?

  참나무 뿌리가 뇌 속에 들어오면 당황스럽겠지만 좀 아프겠지만

  참나무 뿌리 말고 다른 걱정은 없어지지 않겠니

  눈을 부릅뜨고 한들거리는 참나무 가지를 쳐다봐야겠지

  쓸데는 없지만 흙이 참 고급이야

  누가 나처럼 이렇게 부드러운 흙을 많이 갖고 있겠니

  난 이 흙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성을 쌓을 수도 있고

  남자를 만들 수도 있어

  머리에 검불이 붙으면 어떠니

  벌레가 귀에 들어가면 어떠니

  오늘부터 난 여기서 잘 거야

  여기서 살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집에 뭐 있니

  나는 이제 누구의 식구도 아니야

  나는 식구들에게 안 한 이야기를 까마귀에게 한다고

  조금 있으면 까마귀들이 몰려올 거야

  어제보다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야겠지

  그러니 집에는 너 혼자 가

  누가 나를 궁금해 하거든 죽었다고 해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봄호 발표

 

 


 

김개미 시인

2005년 《시와 반시》에 시를, 2010년 《창비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동시집 『어이없는 놈』 『커다란 빵 생각』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 그림책 『사자책』 『나의 숲』 『나랑 똑같은 아이』, 시그림집 『나와 친구들과 우리들의 비밀 이야기』를 냄.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