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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명 시인 / 그럼에도 기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7.

김지명 시인 / 그럼에도 기린

 

 

그럼에도 귀족입니다

 

새들이 물고다니는 고독의 높이에 닿으면

부드러운 공기의 근육이 만져집니다

 

하늘의 연꽃이 흩날리는 마당을 가진 게 아니지만

해안선을 움켜 쥔 초원을 가진 게 아니지만

 

온몸으로 차린 식탁은 풍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뒤축이 가벼운 그이는 이동식 성채입니다

 

멈추면 보이는 먼 옛날 온쉼표의 발자국들

빛나는 주변을 서성이는 부채를 예감합니다

 

긴 다리 사이로 흘러가는 식물들의 표정에서

입술을 털어내려 가시를 키우는 아카시아나무에게서

 

고요도 소요도 우리들의 발성법

관심도 무관심도 위태로워지는 지점

 

나란히 그이를 들어 보세요

 

숨을 줄도 모르고 네 편 내 편도 모르는

이웃 같고 건달 같고 구멍 달 같은

 

은행에 영혼까지 팔아버려 두려울 게 없지만

따뜻한 시선 두려워 뒤만 돌아본 목길이입니다

 

책 속에서 튀어나온 긴 목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를 보며

몸에 그려진 모나지 않은 네모들의 다정한 환청을 들으며

 

발끝으로 세상의 끝까지 걸어 간 키다리 그이가

태양의 감전사라고 나대지의 바람이 들려주는 오후

 

누가 풀꽃을 엮어 화관을 짜 주었을까

 

우두커니 높이를 경배하는 시절입니다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 2015) 중에서

 

 


 

 

김지명 시인 / 꽃의 사서함

 

 

  근처 어디에도 내가 없어

  들판에서 혼자 그려낸 만큼 피우고 섰다

  그의 눈에 띄기 위해 그를 눈에 담기 위해

  먼 길 통증도 분홍의 의지로 편입시켰다

 

  나는 손이시려도 잡을 수 없는 연인일지 모른다

  나는 재미없는 정물이라고 풍장됐을지 모른다

 

  익명으로 털올 바람이 배달되고

  자살하지 않을 만큼 슬픔이 배달되고

  나는 내 얼굴을 몰라

  몸속 깊이 함의한 그가 좋아한 색깔도 몰라

  의심의 꽃대궁으로 그를 기다린다

 

  말문 트는 입술을 훔쳐 건너온

  오해의 여분만큼 그를 이해 할 시간

 

  꽃잎마다 그를 앓는 편지를 쓴다

  어딘지 좀 채도가 부족한 생각일까

  가끔 거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갖고 싶은 사람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랄까

  그가 잠시 빌려온 남의 애인이었으면 좋겠다

  나침판 없는 시계를 찼으면 좋겠다

  내 희망이 바삭 구워지기 전에

 

  매음굴이라는 말로

  공작소라는 말로

  누군가 내 목을 따 갔다

  그건 내 아름다움을 진술한 방식

  어느 꽃씨 부족을 발성하는

  그가 사는 거울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 2015) 중에서

 

 


 

김지명 시인

서울에서 출생.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2013년 《매일신문》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