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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시인 / 그럼에도 기린
그럼에도 귀족입니다
새들이 물고다니는 고독의 높이에 닿으면 부드러운 공기의 근육이 만져집니다
하늘의 연꽃이 흩날리는 마당을 가진 게 아니지만 해안선을 움켜 쥔 초원을 가진 게 아니지만
온몸으로 차린 식탁은 풍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뒤축이 가벼운 그이는 이동식 성채입니다
멈추면 보이는 먼 옛날 온쉼표의 발자국들 빛나는 주변을 서성이는 부채를 예감합니다
긴 다리 사이로 흘러가는 식물들의 표정에서 입술을 털어내려 가시를 키우는 아카시아나무에게서
고요도 소요도 우리들의 발성법 관심도 무관심도 위태로워지는 지점
나란히 그이를 들어 보세요
숨을 줄도 모르고 네 편 내 편도 모르는 이웃 같고 건달 같고 구멍 달 같은
은행에 영혼까지 팔아버려 두려울 게 없지만 따뜻한 시선 두려워 뒤만 돌아본 목길이입니다
책 속에서 튀어나온 긴 목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를 보며 몸에 그려진 모나지 않은 네모들의 다정한 환청을 들으며
발끝으로 세상의 끝까지 걸어 간 키다리 그이가 태양의 감전사라고 나대지의 바람이 들려주는 오후
누가 풀꽃을 엮어 화관을 짜 주었을까
우두커니 높이를 경배하는 시절입니다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 2015) 중에서
김지명 시인 / 꽃의 사서함
근처 어디에도 내가 없어 들판에서 혼자 그려낸 만큼 피우고 섰다 그의 눈에 띄기 위해 그를 눈에 담기 위해 먼 길 통증도 분홍의 의지로 편입시켰다
나는 손이시려도 잡을 수 없는 연인일지 모른다 나는 재미없는 정물이라고 풍장됐을지 모른다
익명으로 털올 바람이 배달되고 자살하지 않을 만큼 슬픔이 배달되고 나는 내 얼굴을 몰라 몸속 깊이 함의한 그가 좋아한 색깔도 몰라 의심의 꽃대궁으로 그를 기다린다
말문 트는 입술을 훔쳐 건너온 오해의 여분만큼 그를 이해 할 시간
꽃잎마다 그를 앓는 편지를 쓴다 어딘지 좀 채도가 부족한 생각일까 가끔 거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갖고 싶은 사람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랄까 그가 잠시 빌려온 남의 애인이었으면 좋겠다 나침판 없는 시계를 찼으면 좋겠다 내 희망이 바삭 구워지기 전에
매음굴이라는 말로 공작소라는 말로 누군가 내 목을 따 갔다 그건 내 아름다움을 진술한 방식 어느 꽃씨 부족을 발성하는 그가 사는 거울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천년의시작,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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