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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형렬 시인 / 대청봉(大靑峰) 수박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6.

고형렬 시인 / 대청봉(大靑峰) 수박밭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던 이 여름밤

  나와 함께 가야 돼. 상상을 알고 있지

  저 큰 산이 대청봉이지.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

  알지. 와선대 비선대 귀면암 뒷 길로

  다시 양폭으로, 음산한 천불동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 지나서

  그렇게 가면 되는 거야. 너는 길을 알고 있어

  아무도 찾지 못해서 지난 주엔 모두 바다로 떠났다고 하더군

  애인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 나나 행복했을 것이다.

 

  너는 놀라지 않겠지. 누가 저 산꼭대기에

  수박을 가꾸겠어.

  그러나 선들거리는 청봉 수박밭에 가면 얼마나 큰 만족 같은 것으로

  劫 속에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와서

  사는 거야. 별 거겠니 겨울 최고봉의 추위를 느끼면서

  걸어 서릿발 친, 대청봉 수박밭을 걸어.

  그 붉은 속살을 마실 수 있겠지.

 

   어느 쑥돌 널린 들판에 앉듯, 대청봉

  바다 옆에서 모자를 벗으면 가죽구두를 너도 벗어 놓고 시원해서

  원시 말이야. 그 싱싱한 생명 말이야

  상상력을 건든다.

  하늘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로

  삼경까진 오겠지 기다리지 못하면 시인과 동고할 수 없겠고

  그게 백두산과 닮았다고 하면 그만큼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맨발로 눈이 새하얗게 덮인, 아니지, 달빛에 비친 흰 이슬을 밟으며

  나는 청봉으로 떠난다.

  독재로 너의 손목을 잡고

  나는 굴복시켜야 돼 너는 사랑할 줄 아니.

  한 가마 옥수수를 찌는 여인의 밤

  그 밤만 가지고, 너와 나 우리 모두 노래할 수 있는가

  가구를 두고 청봉 수박 마시러 나와 간다.

  세상은 다 내 책임이였냐는 듯이 가기로 했다.

 

   이 <대청봉 수박밭> 속에 생각이 있다고 털어놓건

  비유인지 노래인지, 그것이 표명인지

  거짓같지 않은 뜬소문 때문에

  나는 언제고 올테니까.

  대청봉에서 너와 가슴을 내놓고

  여행을 왔노라며, 기막힌 수박인데 하고 뭐라고 할까.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니

  그것이 공산 아니면 얼음처럼 녹고 있는 별빛에 섞여서 바람이 불고,

  수박 같은 달이다. 아니다

  수박만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면

  상상이다 아니다

  알 수 있을까.

 

시집 『대청봉(大靑峰) 수박밭』(靑史, 1985) 중에서

 

 


 

 

고형렬 시인 / 사진리 大雪

 

 

하아얀 눈이 마당을 여드레 내리고 나니

눈이 정말로 무서워졌다. 아흐레 만에 날이 드니

눈물이 나는 오후였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선처럼

해도 우물우물 빨리 서산으로 지려 하고

마을은 오랜만에 빨간 불빛들을 서로 볼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친구들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언제나 어둡고 높고 촌스럽기만 하던 설악산이

시진리하고는 바닷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산이

그날 처음으로 야산이 되는 것을 보았다.

우리하고는 아무일도 없는데 거만하게 하늘로 솟았던

산이 순하디순해져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육백 미터 팔백 미터 산과 수백 미터 낭떠러지가

눈으로 평지가 된 것처럼 신지붕이 야트막하였다.

몇개의 봉우리만이 흐릿한 윤곽을 드러내고

산은 정말 별볼일없는 어촌일지라도 인가 쪽으로 다가왔다.

뽀야니 떡가루를 뒤집어쓰고 잠든 눈 속에 내려앉아서

눈주목 눈측매 눈잣나무가 아주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모든 형상과 색이 파묻혀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세상은 사진리에서 그 끝까지가 고요, 고요였다

공룡 청봉이라는 것들이 눈앞에서 잡힐 듯하였다.

후우 세게 입김을 불면 날아가버릴 듯이 작아져서

마치 산을 사진리에서 멀리로 내려다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오후 이후 이때까지 설악이

그처럼 낮아지고 아름다운 적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해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았다.

발간 등불과 후레쉬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마을

사진리는 그제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

아흐레 동안 산이 눈 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날 내다본 동해는

무슨 일인지 물 속에 다니는 고기 소리가 날 듯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눈도 한 송이 쌓이지 않고, 그만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집 『사진리 大雪』(창작과비평사, 1993) 중에서

 

 


 

고형렬 시인

1954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대청봉 수박밭』(1985), 『해청』(1987), 『사진리 대설』(1993), 『성에꽃 눈부처』(1998) ,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2010), 『유리체를 통과하다』(2012) 등과 장시 『리틀 보이』(1995)를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