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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시인 / 펜
마르지 않는 펜을 꿈꿨다. 애액이 늘 충분한 펜, 누르면 진물이 묻어나는 펜, 그런 몸을 꿈 꿨다 보습을 닮은 펜. 불두덩에 파랗게 보리 순이 돋아나는,
보습이 아니어도 손가락 끝 깊은 수원지에서 새어나오는 갑골의 문자들 새벽마다 또 하루의 펜 쥐고 나도 모르는 나를 불러낸다.
한가운데 갈라진 곳. 늘 촉촉해 마르지 않는 샘 꽃가루가 방전(放電)되고, 벌 나비가 날아드는 언덕에 무성생식의 꽃은 피고,
내 몸에 새겨지는 나. 하루하루 태어나는 내가 모를 나.
계간 『신생』 2018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비린내 물씬,
생명 품은 것들은 비린내를 풍긴다. 공기를 머금은 빗방울이 그렇고, 산란 직전의 고등어가 그러하다. 또한 나는 안다. 비린내 때문에 물고기를 못 먹는 사람들을 입술에 달라붙은 젖비린내 때문에 사내들 그토록 유방을 탐하는 건 아니겠지만 살아있기에 오직 새어나오는 붉은 비린내 발길에 짓이겨진 풀잎에조차 풍겨나는 생의 비린내 어젯밤 야성의 고양이 한 마리 쓰레기통 옆에서 쓰고 버린 콘돔 핥는 걸 보았다. 비린내를 핥고 있었다. 개기월식에 겹쳐진 슈퍼 문 블루 문 수십 년 만에 찾아온 밤이었다. 비린내 물씬, 풍기는 오래된 밤이었다.
월간 『시인동네』 2018년 3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소금쟁이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걸어 다닌다 갈릴리 사람도 아니면서 가볍게 물을 밟고 다닌다. 내 사랑도 저처럼 가볍게 너를 건너갈 수 있다면
하지만 사랑은 물귀신 같아서, 멀쩡한 대낮에 머리채 잡고 소용돌이로 끌어당기는 물귀신 같아서, 나는 늘 검은 물이 무서웠다.
꿈이 있다면, 물 위에 몸을 띄울 수 있다면 몸과 물이, 서로가 서로에게 섞일 수 있다면
내가 물에 뜰 수 없는 건 내가 너를 못 믿기 때문이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못 믿기 때문이다.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금쟁이, 물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사랑의 전문가 그러기에 사랑을 지고도 그는 저토록 유유히 물을 밟고 다닌다.
계간 『모든: 시』 2018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물로 된 뼈
1 뼈 중엔 물로 된 뼈도 있지. 썩지 않는 게 뼈라면 오키나와 해변에서 주운 산호의 뼈, 물거품처럼 희다 물컹한 내 살이 감춘 뼈도 흴까 암으로 죽은 내 친구 화장하고 난 뼈 조각은 희지 않고 누랬다.
2 사십 년 만에 이장하려고 파헤쳤더니 삭은 삼베 속 살은 다 녹고 뼈만 가지런하더란다그 뼈가 그 뼈인가 싶더니 해골에 박힌 치아를 보니 맞더란다. 송곳니 옆에 박아 넣은 은니가 아버지 분명하더라는데 술잔 들어 활짝 웃을 때 슬쩍슬쩍 드러나던 그 은니
3 흔들리는 물속의 낮달 바람이 싣고 다니는 저 먼지, 시간의 뼈가 아닐지 나 없을 그때, 내 딸의 뺨이 떠올릴 뼈는 문득 무엇일까.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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