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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옥관 시인 / 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

장옥관 시인 / 펜

 

 

마르지 않는 펜을 꿈꿨다.

애액이 늘 충분한 펜, 누르면 진물이 묻어나는 펜, 그런 몸을 꿈 꿨다 보습을 닮은 펜.

불두덩에 파랗게 보리 순이 돋아나는,

 

보습이 아니어도 손가락 끝

깊은 수원지에서 새어나오는 갑골의 문자들

새벽마다 또 하루의 펜 쥐고

나도

모르는 나를 불러낸다.

 

한가운데 갈라진 곳.

늘 촉촉해 마르지 않는 샘 꽃가루가 방전(放電)되고, 벌 나비가 날아드는 언덕에

무성생식의 꽃은 피고,

 

내 몸에 새겨지는 나.

하루하루 태어나는 내가 모를 나.

 

계간 『신생』 2018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비린내 물씬,

 

 

생명 품은 것들은 비린내를 풍긴다.

공기를 머금은 빗방울이

그렇고, 산란 직전의 고등어가 그러하다.

또한 나는 안다.

비린내 때문에

물고기를 못 먹는 사람들을

입술에 달라붙은 젖비린내 때문에

사내들 그토록

유방을 탐하는 건 아니겠지만

살아있기에 오직 새어나오는

붉은 비린내

발길에 짓이겨진 풀잎에조차 풍겨나는

생의 비린내

어젯밤 야성의 고양이 한 마리

쓰레기통 옆에서

쓰고 버린 콘돔 핥는 걸 보았다.

비린내를 핥고 있었다.

개기월식에 겹쳐진 슈퍼 문 블루 문

수십 년 만에 찾아온

밤이었다.

비린내 물씬, 풍기는 오래된 밤이었다.

 

월간 『시인동네』 2018년 3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 소금쟁이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걸어 다닌다

갈릴리 사람도 아니면서 가볍게 물을 밟고 다닌다. 내 사랑도 저처럼 가볍게 너를 건너갈 수 있다면

 

하지만 사랑은 물귀신 같아서,

멀쩡한 대낮에 머리채 잡고 소용돌이로 끌어당기는 물귀신 같아서, 나는 늘 검은 물이 무서웠다.

 

꿈이 있다면, 물 위에 몸을 띄울 수 있다면

몸과 물이,

서로가 서로에게 섞일 수 있다면

 

내가 물에 뜰 수 없는 건 내가 너를 못 믿기 때문이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못 믿기 때문이다.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금쟁이, 물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사랑의 전문가 그러기에 사랑을 지고도 그는 저토록 유유히 물을 밟고 다닌다.

 

계간 『모든: 시』 2018년 봄호 발표

 

 


 

 

장옥관 시인 / 물로 된 뼈

 

 

1

뼈 중엔 물로 된 뼈도 있지.

썩지 않는 게 뼈라면 오키나와 해변에서 주운 산호의 뼈, 물거품처럼 희다 물컹한 내 살이 감춘 뼈도 흴까 암으로 죽은 내 친구 화장하고 난 뼈 조각은 희지 않고 누랬다.

 

2

사십 년 만에 이장하려고 파헤쳤더니 삭은 삼베 속 살은 다 녹고 뼈만 가지런하더란다그 뼈가 그 뼈인가 싶더니 해골에 박힌 치아를 보니 맞더란다.

송곳니 옆에 박아 넣은 은니가 아버지 분명하더라는데 술잔 들어 활짝 웃을 때 슬쩍슬쩍 드러나던 그 은니

 

3

흔들리는 물속의 낮달

바람이 싣고 다니는 저 먼지, 시간의 뼈가 아닐지 나 없을 그때, 내 딸의 뺨이 떠올릴 뼈는 문득 무엇일까.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4월호 발표

 

 


 

장옥관 시인

1955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7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바퀴소리를 듣는다』,『하늘 우물』,『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와 동시집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 시 해설서 『현대시 새겨 읽기』 등을 펴냄. 김달진문학상(2004), 일연문학상(2007), 금복문화예술상(2013), 노작문학상(2014)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07 올해의 시’에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가 선정됨. 현재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