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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초우 시인 / 1818년 9월의 헤겔 선생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

이초우 시인 / 채석강(彩石江)

 

 

우리가 오기 전, 이미 신들이 문자를 만들어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 문장으로 남겨

수천만 권 쌓아 둔 저 신의 서재.

 

하얀 구슬 파도 쏴, 하고 부서져 밀려온다.

저 파도의 포말, 신이 버무린 글자의 씨앗이 되었고

파도의 주름은 문장의 행이 되었으며

문단을 가른 것은 파도의 질서가 어긋버긋

조용해진 틈새였다는 것.

 

137억 년 전, 대 폭발로 인한 우주 기원설, 빅뱅의 원초물질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일어났는지,

'호미니드(사람과의 동물)의 출현'이란 신들의 예언서에는 440만 년 전 침팬지에서 나온 한 갈래,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유인원이 직립보행을 시작하여 인류의 조상이 될 거라고 이미 기록돼 있으며,

성단(星團)과 성단을 단숨에 뚫고 지나갈 '웜홀 여행법'도 기술돼 있다는데,

 

누가 저 책들 열어보고 신들의 문자를 해독할 것인가는, 선사시대의 어부 한 사람, 그가

꾼 꿈이 해독의 열쇠가 되었으며, 나 역시 그 어부의 꿈이 구전으로 전해 온 것을, 여기 처음으로 밝혔을 뿐.

 

시집 『웜홀 여행법』(천년의 시작, 2014) 중에서

 

 


 

 

이초우 시인 / 1818년 9월의 헤겔 선생

 

 

해가 저문 뒤, 나는 옛일을 더듬으러 선창가엘 갔다.

섬으로 가는 뱃길은 끊기고

포크레인 굉음 소리의 잔해가 고여 있는 바다에는

항로를 무시한 통통배 한 척이

내 피부에 빗금 자국을 남기며 달린다.

낮은 하늘에는 환하게 켜진 외등 하나 두둥실 떠 있다.

외등의 전주대는 수면 위에 펼쳐진 황금 실크

실크 자락을 타고 오르며 일렁이는, 나는

그때 F학점을 받았지.

신입생의 나날은 갈등의 천국이었어.

별빛바저 지워버린 암청의 하늘, 저 높은 백열등 좀 봐

표정은 낯설지 않다.

헤겔 선생의 얼굴임이 틀림없어.

재시험을 치른 나는 B학점을 받아냈지.

 

안경테의 자국 하며, 저토록 맑고 담담한 모습, 때는 1818년 9월 어느 날 베를린 대학의 교수 헤겔 선생을 나는 지금 만나고 있는 거야. 선생은 내려다보신다. 매랍지의 공단을, 야근중인 제철 공장의 쇳소리를 . 바다의 매립은 계속되고, 선생의 얼굴 뒤 펄쩍 뛰어내려도 될 지척의 바다, 3초 간격으로 좌  우, 홍 청등이 반짝거린다. 항로 표지는 아무런 표정이 없으시다. 선생의 잔잔한 모습 아래 펼쳐진, 홍 청 등의 눈을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 내가 헤겔 선생으로부터 받아야 할 애초 학점은,

 

시집 『1818년 9월의 헤겔 선생』(한국문연, 2007) 중에서

 

 


 

 

이초우 시인 / 개기월식

 

 

1.

초저녁잠이 깊이 든 암자를 빠져 나와

나는 바닷가 오솔길을 걸었다.

황금줄을 늘어뜨린 채 초파일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봉긋봉긋 누워 있는 공동묘지가 일어선다.

어디선가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불그스레한 연등이 익어간다.

그 환한 등불을 바라보며 잠시 합장을 할 때

샤륵샤륵 가위 소리,

내 목에 감긴 탯줄이 잘려나갈 때까지

나는 세상을 향해 긴 울음의 예를 올렸다.

창호지 같은 연등의 살결이 파르르 떨렸다.

 

2.

창호지 벽에 비친 어머니의 얼굴, 제단 앞에서 오른 손으로 따글따글 염주알을 굴리며 마른 내 탯줄 안으로 금강경을 들여보내신다. 집안에 신당을 모셔야 오래 산다며 선뜻 내민 오방기, 이승에서 못해본 괘를 지금 나에게 뽑으라신다. 아 어머니 저를 시험에 빠뜨리지 마세요. 도망치듯 빠져 나와 산길을 달리지만, 나는 여지없이 나무등걸에 걸려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갑자기 무언가 눈탱이를 맞은 듯 세상이 훤하게, 그러나 곧 깜깜해진다, 암자처럼

 

 


 

 

이초우 시인 / 혹 피쉬킬러를 아십니까

 

 

여행원이 까르르 웃는다.

피쉬킬러를 아십니까?

제 아이디랍니다.

우리말로는 물장군이라 하지요.

비록 3급수 이하에 살지만

분홍가재가 부럽지 않은

물 속 곤충들의 장군이랍니다.

이 장군을 저는

오늘 인터넷이라는 하천수에서 만났지요.

아, 불현듯 옛날이 생각났어요.

아버지 따라 산 속 가재를 잡으러 가던 날

가재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물장군이 제 앞에 나타난 것이었어요.

그 작은 체구의 보랏빛 물장군이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개구리를 슬금슬금 따라가다가

어느새 허리를 껴안고는 체액을

송두리째 빨아먹는 것이었어요 순식간에!

오해하지 마셔요, 저는 물장군이 아니랍니다.

그저 어린 날의 피쉬킬러 한 마리를

건져 올린 것뿐이에요.

자꾸 쳐다보지 마셔요.

이 마이너스 통장이 저의 전 재산이랍니다.

그 속에는 난폭한 황소개구들이 득실거리지요.

그러나, 이 조그만 물장군을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

안녕히 계셔요.

 

 


 

 

이초우 시인 / 엉겅퀴 어머니

 

 

봄이 오면 조롱박에서 어머니 냄새 난다.

가시 잎 속 자홍 꽃, 보송보송.

봉분 위에는 달이 자라고,

엉겅퀴들이 어머니 몰래

이승의 시간을 지우고 있다.

 

모롱이 돌아가면 먼저와 기다리시는 어머니, 이승의 나이 거꾸로 잡수시는 어머니, 젊어지신다. 자꾸만 엉겅퀴 속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 송이채로 매달린 이승의 시간을 지우며, 뻘 깊은 뿌리 속을 걸으신다. 하염없이. 뿌리가 씻어 주었을까? 티없이 맑다. 화장도 하시지 않은 얼굴, 봉분처럼 하얗고 둥글다.

 

2004년 《현대시》등단시

 

 


 

이초우 시인

경남 합천에서 출생.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1818년 9월의 헤겔 선생』, 『웜홀 여행법』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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