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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정란 시인 / 모순을 기르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4.

최정란 시인 / 사디즘, 마조히즘

- 당목 撞木

 

 

모른다. 나는 모른다.

종의 몸이 날마다 고통으로 우는 것.

모른다. 나는 모른다.

고통으로 우는 종의 몸이

천년 후까지 울려 퍼질 금빛 종소리를 낸다.

 

이 생에 나는 쇠의 몸을 받지 않았으니

나무의 몸을 받았으니

나무로 태어나 이 운명을 받았으니

 

너를 울게 하는 나는

네 옆구리에서 금빛연화문을 피워내고

너를 빛나게 하는 나는

이마로 종을 들이박는 당목이니

 

내 몸을 깨어 종소리를 불러내는 운명을

마다할 수 없으니

 

너를 들이박을 때마다

정수리가 으깨지고 온몸이 세로로 찢어진다.

 

종이 천 년 시간을 이겨낼 동안

종소리로 세상의 하늘과 땅을 두루 울릴 동안

나는 수 천 수 만 번

들이박고 찢어지고 버려지고

버려지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버려질 것이다.

 

동안거에 든 수행자의 방구들을 데우거나

밥을 짓는 공양주의 손끝에서

아궁이 한줌 재로 스러져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로 돌아가거나

 

종소리를 듣고 구원받은 어느 중생도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계간 『두레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슬픔의 지층들

 

 

꽃을 좋아하는 남자와 살았던 여자는 일이 많았다. 아름다움이 자기 몫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허드렛일을 여자에게 맡기고 집 밖을 나돌았다. 아름다운 것은 대체로 집밖에 있다는 듯이, 세월은 빨리 흘렀다.

 

그 사이 넓은 미나리꽝은 돋우어져 집터가 되었다. 밖의 아름다움을 향해 손 내미는 일에도 지쳤을까. 집으로 돌아온 남자가 처음 한 일은 땅 둘레에 수천 포기 해바라기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그 사이에도 여자는 일이 많았다. 아름다움 뒷바라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많았던 여자는 자주 아팠다.

 

태양이 찬란한 금빛 성을 주겠노라 뒤늦게 남자는 여자에게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해바라기 울타리가 에워싼 성 안에서 굳건했고 늦여름 한 철 반짝 촘촘했다. 가을이 오자 해바라기성은 빛나는 황금의 꽃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해바라기는 가을까지 화사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미나리꽝이 한 필지씩 팔려나갔다.

 

이듬해 남자가 소국을 심었다. 여름 한 철만 무성한 꽃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을까.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노란 꽃들이 듬성듬성 그의 남은 영지를 에워쌌다. 꽃들은 키가 작아 남자의 구멍 많은 성을 성답게 만들지 못했으나 띄엄띄엄 향기로웠다.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움은 향기를 가져야 해.

 

아름답구나. 꽃 위에 내리는 눈, 남자는 언젠가부터 혼잣말이 많아졌다. 일이 많았던 여자는 자주 아팠던 여자는 더 이상 없었다. 미나리꽝을 돋운 땅도 모두 사라졌다. 꽃을 좋아하던 남자는 그 후에도 오래 혼자 살았다. 꽃과 일과 병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는 자주 서러웠다.

 

계간 『리토피아』 2018년 여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직립보행

 

 

뼈가 하얗게 드러난 무릎이 흉터로 뒤덮인 후에

직립을 더듬는다

 

땅만 잘 디디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더 잘 디뎌야 한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두 발이 땅을 디딜 때 두 팔이 번갈아 허공을 디뎌야 한다

 

땅바닥이 견고하게 받쳐주어도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은

두 팔이 제 몫을 다하지 않기 때문

허공을 딛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할 두 손이

엉뚱한 데 골몰하기 때문

지상의 금화를 움켜쥔 손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잡으려다가

허공의 검은 돌부리에 걸리기 때문

허공의 숨은 함정에 빠지기 때문

 

사람이 허공을 딛고 걸을 줄 알고부터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으나

직립보행을 하고 부터

허공을 잘 디뎌야 한다는 사실은 곧 잊혀졌지

 

제발, 걷기에 집중 좀 해줘!

산만한 손은 발의 간절한 애원을 걸핏하면 잊고

멍과 흉터와 골절은 다리의 몫이 되지

 

빈 손으로 휘적휘적 허공의 풀밭을 휘젓고

빈 주먹으로 허공의 돌다리를 두드린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아니

쓰러지기 위해서, 다시 쓰러지기 위해서,

더 잘 쓰러지기 위해서*

한 걸음씩 허공을 짚는다

빈 손바닥으로 허공의 길을 더듬는다

 

바람에 지워진 허공의 손자국 위에 심장을 내려놓고

더듬더듬, 한 치 앞도 모르는 직립의 나날들

 

* 모리스 블랑쇼의 "Fail, Fail again. Fail better."에서 Fail을 Fall로 바꾸었다. "To fall. To fall again. To fall better."

 

계간 『두레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모순을 기르다

 

 

완강하고 무성한 방패들을 만들며

연못은 진흙탕 같은 전쟁을 예감한 것일까.

그 방패 한 번 뚫어 보겠다고

뜨겁게 달군 불칼을 휘두르며 땡볕 군단이 몰려오고

굵은 빗방울  화살을 쏘며 소나기 사단이 맹렬히 다녀가고

향기로운 꽃의 연대가 고운 얼굴로 천막을 치고

말없이 머물렀지만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할 방패

가을이 오도록 무성하였다.

 

연못에게 저렇게 많은 심장이 있었나.

눈 내리고 비로소 겨울.

무수히 많은 살얼음 낀 심장을 관통하는 창들,

예각의 끝이 찌르고 있는 연못에서 전쟁은

제 안에서 차갑게 치열했을까.

 

연못이 그토록 막고자 한 창이

제가 피워올린 꽃대와 잎자루 라니

제 가슴 찌르는 치명적인 창을 제가 만든다면

밖을 방어하는 방패들은 얼마나 속절없는지

 

그토록 완강하고 무성했으나 흔적 없이 썩어 사라진 방패들

썩지 않고 남아있다 한들

제 심장 제가 겨누는 어리석음, 막을 수 있을까

 

계간 『두레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쓸쓸한 강적

- 남편이라는 인류, 혹은

 

 

      소파에 길게 누운 수사자가 코를 고네.

      동물의 왕국에서 언제 빠져나왔나.

      움켜쥔 리모컨이 누떼를 향하네.

      어디로 불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초원의 바람 같은 야생의 수컷.

       

      길들일 생각 꿈에도 하지 말라더니

      생활의 고삐 묶여 가축으로 길들었을까.

      이따금 사바나의 풀들이 부르는지

      떠나겠어, 아이들 대학 졸업하면

      떠나겠어, 할리 데이비슨 타고

      노래처럼 주문처럼 거듭 되뇌더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구차하게

      아주 떠나는 발목 잡지 말라더니

      사륜구동 지프 시동 걸며 부르짖던

      포효의 오프로드는 언제 잦아들었나.

       

      삶에 속속들이 등골 뽑힌 수사자

      헝클어진 초록갈기 듬성듬성

      오후 네 시의 가죽소파가 코를 고네.

 

계간 『두레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최정란 시인

1961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당선  등단. 시집으로 『여우장갑』 (문학의전당, 2007), 『입술거울』( 문학수첩, 2012), 『사슴목발애인』( 산지니, 2016) 이 있음.  2008년 부산작가회의창작기금. 2009년 제1회 요산창작기금. 2016년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