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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선우 시인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

김선우 시인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의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지 너무나 오래 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 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 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중에서

 

 


 

김선우 시인

1970년 강릉에서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작과비평사,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와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작과비평사, 2002) ,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과 그 밖의 저서로는 전래동화『바리공주』와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 실천문학사, 2008)와 『캔들 플라워』 (예담,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문학상,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 과 이육사문학상 그리고 2008년 한국여성문예원 선정 제1회  '올해의 작가상'과 제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 賞 수상. 현재 '시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