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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시인 / 세헤라자데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 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귀에 속삭일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 중에서
강성은 시인 / 환상의 빛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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