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현림 시인 / 세기말 블루스 1 ―곧 잊을 수 없는 저녁이 올 거야
곧 잊을 수 없는 저녁이 올 거야 죄와 악이란 말을 잊었듯이 그 저녁도 잊을 거야 잊혀진 사람과 사라진 동물을 적어봐 별을 삼키고 속죄의 시를 적어봐 오늘은 컴퓨터 냄새가 싫으니까 손으로 쓴 편지로 나를 울게 해봐
지금 나무를 심지 않으면 내일은 해가 뜨지 않을지도 몰라 유럽이 물바다고 한반도는 가뭄중이고 떡 파는 노점상의 얼굴이 싸이렌처럼 우는 걸 보며 광화문을 지나다가 공포심이 생겼다 낙엽도 비닐처럼 썩지 않는 여기 작부의 가랭이처럼 슬픈 여기 30년 후엔 어떻게 될까 70년 후 해수면이 4센티 높아지면 조상님 무덤은? 너와 나의 자식은? 머릿속에 독수리가 날고 자동차가 달린다 자동차의 스피드, 광고의 스피드, 농구의 스피드 스피드의 황홀만이 두려움을 마비시킬까 지옥에 살면서 뭐하러 종말을 두려워하니?
20년 후에 나는 폐경기야 막 낳은 달걀처럼 매일이 따뜻할 수 있다면 성서나 베케트가 마약일 수 있다면 쓰러져가는 혼에 불을 지필 사람이 필요해 함께 죽어갈 사람이
시집 『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사, 1996) 중에서
신현림 시인 /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당신도 매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헤매는군요 저도, 홀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 중에서
|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선우 시인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0) | 2019.07.03 |
|---|---|
| 박주하 시인 / 폭풍의 언덕 외 1편 (0) | 2019.07.03 |
| 강성은 시인 / 세헤라자데 외 1편 (0) | 2019.07.03 |
| 김미령 시인 / 측정 외 1편 (0) | 2019.07.03 |
| 김신영 시인 / 건반이 궁금해지는 저녁 (0) | 2019.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