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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하 시인 / 폭풍의 언덕
당신의 입술에서 피냄새가 났다. 그 시간 거울 속으로 알몸의 가을이 들어와 석양에 물든 강물을 꽂기 시작했고, 강의 저편으로 늘 마지막인 듯한 기차가 언덕을 스쳐갔다, 순간 지난한 슬픔의 당신이 미뤄두었던 여행처럼 빈정거렸다, 자긴 누구야? 검은 침묵과 생의 잡목에 대못을 박고 재빨리 회전하는 당신을 보았다, 자긴 왜 발자국을 남기지 않아? 나는 벌떡 일어나 당신의 가슴을 뜯어보았다, 파도의 바닥이 펼쳐지고 당신의 갯벌에선 마른 신음소리가 났다, 아직은 아냐, 음악이 되기까지 당신의 비명은 조금 색다른 저음을 품어야만 했다, 위태로운 바람은 떨고 있는 당신의 영혼을 한사코 깊은 숲속으로 몰아넣었다, 더, 더 깊은 흑암(黑巖)의 연못에 이르기 위해 휘몰아치는 당신 곁에서 나는 내 잎의 여름을 모두 비워버렸다, 거울 속의 가을이 뿌옇게 울기 시작했다, 이 단풍잎은 당신이 가져,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나를 창백하게 돌아다보는 당신의 젖은 눈에서 철지난 앵두꽃이 피었다, 사랑을 끝낸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들꽃, 2003) 중에서
박주하 시인 / 사막의 잠
꽃이 아무리 추하게 진다해도 피어날 적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지요. 나는 오늘도 부끄러운 하루를 꺾어들고 슬픈 얼굴로 잠을 청합니다. 수척한 잠의 행색으로 등이 휜 별들이 바닥으로 파닥파닥 내려갑니다. 별들은 밤 사이 낙타의 등에서 샘을 파고 바람이 불면 힘껏 날아오르겠지요. 투명한 얼음처럼 빛나던 별들은 또 얼마나 소란스러울지. 그러나 눈을 감고 참겠습니다. 이 지독한 세월, 본디 희망이란 부산스러운 것이니까요. 별들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생을 가뿐히 넘는 동안 어디선가 꺾이지 못한 질긴 소망이나 젖지 못한 죄를 오래오래 반성하겠습니다. 적이 먼 이국의 강에서 모래바람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래도 지금 바람에 묻어오는 어떤 꽃씨도 접수할 계획이 없습니다. 내 가슴에는 이미 가시 돋힌 붉은 선인장 하나가 처연히 자라나고 있으니까요. 내가 길러낸 날카로운 가시가 장난처럼 폐부를 깊숙이 찔러옵니다. 이 고통은 참을 수 없이 즐겁습니다. 피어날 꽃을 위하여 나는 오래오래 건조해지겠습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들꽃, 200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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