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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신용 시인 / 滴 ―사양, 혹은 飼養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0.

김신용 시인 / 滴 ―사양, 혹은 飼養

 

 

노을이다. 언제부터인가 저녁노을 앞에 서면

스테판 츠바이크의 말이 떠오르곤 한다. 언어를 창녀처럼 다루면

그 언어는 언젠가는 가혹하게 복수를 한다는―, 그 말

전신을 붉게 물들이며 아프게 젖어오곤 한다

혹시 나도 설탕을 먹여 언어를 키워온 것일까?

한때 나 또한 공기를 먹고 내장을 부풀린 적 있었다

바람 빠진 공처럼 텅 빈 몸이었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 노을 앞에 서면 부끄럽다. 사양(斜陽)을 사양(飼養)하지 못한

언어에게 모든 것을 주지 못한 생의 사양(斜陽)만이

또 저녁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아무리 생활이 고달프더라도

넋의 뼈를 잃지 말라는― 혼의 뼈를 잃지 말라는―

그 의미 앞에 서면, 또 속절없이 앙상히 뼈만 남은

마른 갈대 하나로 흔들리는― 나를 본다

몸에 물기 하나 없이 마른 갈대 하나로 흔들리는 나를 본다

그러면 이제 저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걸까?

걸어들어 가, 마치 분신이듯 부끄러운 뼈 하나 남김없이 불태워야 하는 걸까?

그래, 뼈만 남은 마지막 하나의 흔들림으로 불타오를 때, 저 사양(斜陽)은

사양(飼養)이 되어준다고, 벌판의 마른 갈대들은 속삭인다

비선(秘線)의 음성처럼 속삭인다. 그렇게 내 생의 키친 캐비닛이 되어주고 있는

이 저녁, 내 사양(飼養)인

사양(斜陽)―.

 

또 노을이다

 

자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니― 부끄러운 뼈 하나로 남은 생이니―

 

반년간『시에티카』 2018년 상반기호 발표

 

 


 

 

김신용 시인 / 滴 ―나비 잡아라 2

 

 

하필이면…… 왜 배추 속을 둥지 삼을까……?

눈앞에서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린다.

두 손바닥으로 탁 치니 엷은 입김처럼 납작해져서 손바닥에 붙어 있다.

배추흰나비는 나비가 아니란다.

배추를 병들게 하는 해충이란다.

해충은 이렇게 잡아줘야 한단다.

그렇게 말하는 어미의 입술은 단호하다.

자, 이 배추 속을 보렴!

이렇게 알을 슬어놓았잖니! 이 알은 처음에는 물방울처럼 맑아 보여도,

곧 이 속에는 배추 속은 갉아 먹는 애벌레가 자란단다.

 

그 애벌레가 깨어나면 배추 속을 파먹으며 자라, 배추가 곧 병들게 된단다.

아파서 앓게 된단다.

자, 여기 보렴―.

배추 속마다 애벌레가 파먹은 흉터가 생기면서, 배추 빛깔이 검게 변하고 있지 않니―.

그리고 이것 봐, 알에서 깨어난 푸른빛의 애벌레들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

배추 잎마다 구멍을 뚫어 놓고 있지 않니―.

이 상처 때문에 배추가 아픈 거란다. 배추가 아파 병들면

우리는 배추를 먹지 못하게 된단다.

 

배추흰나비가 날아와 알을 낳아 놓으면……

배추 속잎마다 이렇게 알을 맺어 놓으면……

그러니 아가야, 배추흰나비는 잡아줘야 한단다.

배추흰나비는 나비가 아니라 해충이니까―.

그러나 아이는 울먹이며

어머니의 손바닥에 엷게 붙어 있는 배추흰나비의

날개를 떼 내 공중으로 후 날려 보내준다

어미의 눈길이 흔들린다.

그 눈길이 여리고 흰 배추흰나비 같다.

 

계간 『문차』 2018년 여름호 발표

 

 


 

 

김신용 시인 / 滴 ㅡ저수에 대하여

 

 

저기, 벌판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두 그루가 있다고 상상해도 상관없다) 나무는 꼭 저수(樗樹)처럼 서 있다. 가구를 만들면 부서지고 문짝을 기둥을 만들어도 곧 썩어, 아무도 베어가지 않는다는 나무. 아무도 베어가지 않아 오래 살아남는다는 나무 그렇게 오래 살아남아 가지 뻗고 잎 무성해지면, 먼 길 걸어 지치고 고단한 발걸음들이 쉬어 가는 그늘을 드리운다는- (그래서 장자에게 ‘아무 쓸모없음의 쓸모, 無用의 用‘을 말하게 한-)나무처럼 서 있다.

 

나는 그 그늘을-, 나무의 상상력이라고 상상한다. 마치 내면의 상처처럼 뻗어 나온 가지가 움켜쥔 잎은-, 사유 같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키 낮은 관목처럼 못생기고 볼품없이 자라 올라, 이제는 늙어 고목이 된, 힘줄 불거지고 메말라 갈라진 수피의 등걸로 꾸불텅 가지를 뻗고 있어, 어떤 도끼도 톱날도 쉽게 다가오지 못할 것 같은... 저 나무가 드리우고 있는 그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록 이파리 하나 먹을 수 없는-, 그래서 假竹라고 불리우는-, 이 쓸모없는 나무가 가짜 중을 닮았다고 하여 假僧木으로도 불리우지만, 저렇게 늙은 고목으로 자라 올라 거기, 무겁게 드리워진 그늘-. 바위처럼 완강할, 그늘-.

 

나는 그 그늘을, 허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상상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한다

 

무슨 농담인 듯 익살인 듯, 아무도 베어가는 사람이 없어 오래 살아남아, 마치 허구 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지만

 

그 그늘 아래 서면, 못생긴 가승목 같은 내 그림자도

누구의 문짝 하나, 기둥 하나로 서 있을 것 같은-

 

결코 상상이 아닌, 허구가 아닌, 살아있는 형상으로 서있을 것 같은-

 

저기, 벌판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가 땅에 떨어진 씨앗일 때부터, 나비를 열망하는 <상상하는 세포>*를 가진 것처럼

 

*조안나 메이시의 ‘산파’에서

 

계간 『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발표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1988), 『개 같은 날들의 기록』(1990),『몽유 속을 걷다』(1998), 『환상통』(2005), 『도장골 시편』 (2007),  『바자울에 기대다』(2011), 『잉어』(2013) 등과 장편소설『달은 어디에 있나 1,2』

 『기계 앵무새』 (1997), ‘『달은 어디에 있나 1. 2』 <고백을 이 제목으로 재출간> (2003), 『새를 아세요?』(2014)  등이 있음.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과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시인광장문학상과 같은 해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