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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강록 시인 / 애가(哀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9.

황강록 시인 / 애가(哀歌)

 

 

  나는 고대의 시인들이 멸종하지 않은 것을 보았네. 뒷골목에서

  그들은 늙은 채로, 여전히 어린 채로 있었네

 

  음유시인들은 시를 읊고 노래하였으며, 신을 매개하던 명상가들 이었네.

  그들은 신과 인간의 이야기를 연극하였네. 그들의 몸이 상징이 되곤  하였네.

  불길한 소문과 음악소리를 따라 밤을 떠돌면 나는 그들을 만날  수 있네.

  그들의 눈은 도시의 구석에 뚫린 구멍,

  검은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이가 없네.

  웅얼 거리는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네.

  종이 위에서도, 광인의 하얀 진단서 위에서도

  그 말들은 정리되지 않고 꾸물거리네.

  노래와 피리 소리는 거침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을 뿐,

  사랑을 노래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은 없네.

  그들이  희망을 노래하더라도 거기에   희망은 없듯이,

  노래할 수 없는 것을 노래하는 이들을 나는 보았네.

  클럽에서, 이동식 앰프에서 웅얼거리는 이들은 명상에 젖어,

  아무데서나  잠을 자며, 오공 뽄드와 소주는 피안으로 이르는 값싼 재물,

  위험한 재물은 경찰도 잡신들도 손대려 하지 않네.

  위험한 언어는 슬프고 높은 신에게 바쳐져

  조서에도 남아있지 않네.

  그들의 사망 신고서는 해부용의 메스로도 가를 수 없는

  깊고 하얀 심연에 있네.

  겁먹은 의대생들은 하얀 시트 위에서 칼을 들고 우네.

  그들이 알 수 없는 막연한 죽음이 뻔뻔스럽고 서글프게 벌거벗은 채

 

  .......

 

  은밀한 화장터에서조차 그들은 연기를 남기네.

  노래는 검게 검게 하늘로 올라 가고,

  집 나간 아이들은 무엇에 홀렸던 듯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오네.

  돌아올 집이 없어도 끝없이 돌아오려 하네.

  돌아갈 곳이 없어도 나는 고대의 시인들이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음을 아네.

  우린 어느 뒷골목에서 코피 흘리며,

  소주 마시며 다시 만날 거라네 살아있는 한,

  노래하고, 웅얼거리며,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이  없어도,

  명상하고, 연극하며, 살아 있지 않아도

  이 도시는 여전히 폐허로서 아름다울 것이네

 

시집 『지옥에서 뛰어놀다』(시인시각, 2009) 중에서

 

 


 

 

황강록 시인 / 해피 버스 데이

 

 

  우리 엄마가 날 잡아 먹을 거란 걸 알아

  넌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야

  내 열 여섯 번째 생일 날

  멋진 생일잔치를 치르고, 밤새 떠들썩하게 노래하고

  엄마, 아빤 기뻐서 울겠지

  다음날부턴 나를 볼 수 없을 거야

 

  난 맛이 없어지려고 나쁜 짓을 했댔었어. 머뭇

  거리면서, 겁나지만, 용감하게.... 보람이 있을까? 만약

  파티가 끝나고 내가 한쪽 팔만 없는 채 널 만나면

  그럼 일이 잘 된 걸로 알면 될 꺼야

  팔 하나를 먹어 보곤 맛이 없어서 그만 둔 걸 테니까

 

  우리 엄마가 날 잡아 먹을 거란 걸 알아

  내 열 여섯 번째 생일이 지나면

  넌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만약 운이 좋다면

  올해는 팔이 없어진 나를 볼 수 있을 테구

  내년엔 (내가 열심히 말을 안 들으면 - 들키지 않게, 몰래)

  다리가 없는 나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일이 반복되다 보면

  내 머리까지 먹어 버리게 될지 모르지만

  그 전에 내가 너무 맛이 없어져서

  포기하길 바래야지, 뭐

 

  우리 엄마가 날 잡아먹을 거란 걸 알아

  내 열 여섯 살 생일이 지나면

  넌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시집 『지옥에서 뛰어놀다』(시인시각, 2009) 중에서

 

 


 

황강록 시인

196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철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0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으로 등단. 현재 시인, 작곡가, 공연 연출가로 활동 中. 시집으로 『지옥에서 뛰어놀다』(시인시각, 200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