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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용목 시인 / 새들의 페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9.

신용목 시인 / 새들의 페루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들

  콱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환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월간 『현대문학』2005년 11월호 발표

 

 


 

 

신용목 시인 / 수렵도

 

 

참치횟집 주방장은 왕관보다 높은 모자를 썼다

누구의 무덤에서 발굴된 풍속인가, 회벽의 그림 속 산수는 단풍 들지 않고

밤마다 나는 말굽에 쫓겨 산중을 헤매는 꿈에 자주 젖었다

 

액자 속 장생하는 고대 왕의 어깨보다 천년을 도망하는 짐승의 눈빛을 나는 더 많이 보았던 것이다

 

세상의 왕은 빗물처럼 사라졌으나, 모든 화살은 박물관으로 날아가고 초원의 말은 경마장을 달리고 있으나 왕의 옆구리, 칼날만은 남아 지금 도마 위를 걷고 있다

 

도마 위의 발자국, 저 발겨진 살점들이 지난밤 내 꿈의 흔적이다

식탁이여, 경건한 백색 조명 아래 널브러진 걸음 가지런히 목구멍의 장지로 보내는 주방장의 모자도 희지만

 

강원도 깊은 덕장에서 하늘의 목 축여주며 입 벌려 마지막 고함을 산천에 뿌리고 싶지 않은 생이 있던가, 저 도막 난 근육들이 주름진 내장을 헤엄쳐 오늘밤 내 꿈의 산중에 닿을지도 모른다

 

왕의 말굽이 도마 위를 질주하는 참치횟집, 무너진 시대를 품고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회벽 반대편은 지금 빗물이 타흐를 것이다. 그 등허리로 수묵처럼 섞이는 어둠,

 

누군가 피 흘리고 섰으니 아직 수렵은 끝나지 않겠다

 

계간 『작가』 2002년 겨울호 발표

 

 


 

신용목 시인

1974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성내동 옷수선집 유리문 안쪽〉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와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창비, 2007)가 있음. 시작문학상과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