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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희 시인 / 순장
그 속엔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도 있지, 나의 사랑과 나의 궁핍과 나의 파열도 있지
꼬리를 단 시간이 재깍거리고, 날짜들이 깃발처럼 벽에 걸려 펄럭거리지, 건너편 고층빌딩이 통유리 넓은 창으로 24시간 들여다보지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점점 배가 불러지면, 아치형 창을 내고 40층 50층까지 올라갈 수 있지
밤이 되면 전자 키 달린 출입문 안에서 혼자 밥을 먹지
곁에 누운 남자가 가끔 눈을 뜨고 일어나지, 빠끔빠끔 담배를 피우고,그러다 다시 죽은 척하지
더불어 사는 무덤 1605호분
불룩한 배를 만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도 몰래 작은 아이를 낳지바깥으로 바깥으로 기어나가는,
시집 『서른여섯 가지 생각』(시와사상, 2012) 중에서
안효희 시인 / 니체와 함께
백 년 전 니체와 사십 년 동안 헌 책방에서 니체의 먼지를 털어낸 주인과 1993년 10월 다 읽은 니체를 팔아넘긴 남자 김00 씨
나는 동시에 세 남자를 만났다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는 부분마다 그가 굵은 연필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창 밖을 보다 떨어뜨린 담뱃재로 말을 걸어왔다
오로지 걸어가기로 하자 단지 이곳에서 빠져나가자 아마 우리의 거동은 전진처럼 보이리라*
책을 만질 때마다 뱉어져 나오는 뒤섞인 숨소리 그와 그 주인과 그 남자
허리 굽은 헌책방 주인이 니체와의 동거를 주장했다 니체와 마주앉아 담배를 피웠다고 주장하는 김 모 씨 그들은 각자의 몫을 요구했다
누런 책장을 넘기자 눈이 내리고 비가 내렸다 작품이 입을 열 때 작가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지나갔다 나는 나의 작품을 변명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시집 『서른여섯 가지 생각』(시와사상, 201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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