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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시인 / 흰색, 침묵
이 도시는 왜 이렇게도 조용한 걸까 거미줄처럼 길은 안으로 안으로 향한다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노인 한 사람이 제단 앞 측면 자리에 앉아 있다 문 앞에서 천장과 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노인과 나는 다른 공간으로 멀어졌다 잠시 후 청년이 들어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가 섰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거기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
노인이 일어나 그를 껴안았다 그들 앞에 죽은 이가 놓여 있음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노인이 앉아 있던 시간도 청년이 내 옆을 지나 앞으로 걸어나간 순간도 그저 고요했기에 그들의 호흡에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기에 슬픔의 기류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
그들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성당에서 들은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죽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고, 그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필요치 않았다
하루쯤 지난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려 한 적 있다
이 도시는 어떤 죽음을 침묵으로 애도하고 있다 식당도 텅 비어 혼자 달그락거리며 짧은 식사를 마쳤다 발을 겨우 디딜 만큼 좁은 계단이 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미로의 흰색 골목은 깊이를 높이로 대신한 걸까
제단을 향해 누워 있던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침묵으로 지키고 있는 자의 죽음이란 마침표처럼 단정하여 내가 품고 있던 말줄임표는 낯선 도시에서 죄 없이 자꾸 무거워졌다 치스테르니노의 골목과 흰 집과 계단들은 모두 침묵의 복잡한 기호들 검은색 슬픔을 흰색으로 완고하게 덧칠한 계단과 골목들이 나를 포위했다
계간 『문학동네』 2017년 봄호 발표
조용미 시인 / 묵매도
내 앞에 아른아른 떠 있는 저 여린 색들은 이 봄을 규정한다 지금 여기 이곳을 자주 비우는 내 삶을 규정한다 여름과 겨울의 감각을 내정한다
지난겨울 천의와 박대를 휘날리며 허공을 날고 있는 닫집의 비천상을 고개 젖혀 어둠속에서 오래 바라보았다 어둑한 붉은색과 희고 푸른색들은 장엄하였으나 슬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옥룡사터 동백숲 떨어진 붉은색들이 일제히 향한 쪽으로 내 운명을 짚어볼까 잠시 망설였다 무덤이 사라지고 탑이 들어선 자리는 너무 환해 그곳으로 나가지 못했다 밝은 곳의 붉은색들은 희미해져가고 사라져 가고
내 발아래 붉은 꽃들은 뭉개어지는 빛들은, 목이 메어 자꾸 어두워졌다
고택의 엎어놓은 장독에 매화나무 가지 그림자가 어려 굵은 사선의 무늬가 생겨났다 늙은 매화나무가 강한 필세로 그려놓고 내가 발문을 쓴 귀한 묵매도 한 장 얻어온 후 신기하게도 이 봄의 슬픔은 약간 줄어들었다
월간 『문학사상』 2017년 5월호 발표
조용미 시인 / 봄의 묵서
당신은 몸뚱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독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요 살가죽의 고독, 눈꺼풀의 고독, 입술 가운데 주름의 고독,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이 구겨진 듯 오래 접혀 있을 때의 고독, 무너지지 못하는 등뼈의 고독, 종아리 속 정강이뼈의 고독,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어두운 피의 고독을
당신도 혹 이곳에 발붙이고 있어도 늘 저곳을 향하고 있는 마음이 따로 있진 않은지요 자의식 과잉의 먹구름이 늘 폭우를 동반하고 머리 위를 떠다닌다면 그 정신과 육체는 너무 습도가 높아 목까지 찰랑이는 슬픔이 그득 차 있겠지요
어떤 마음은 슬픔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 맺고 스러져 갑니다 어떤 마음은, 몸속 어딘가에 깨알 같은 혹을 만들어 놓고 키웁니다 슬픔이 불러들인 미세한 파장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혹은 몸 안에서 따뜻하고 서글프게 오래도록 머뭅니다
생강나무에 물이 올라 노란 꽃이 맺혔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꿰뚫어 보면 그 실체가 물질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노랑에서 분홍으로 봄이 자리를 조금씩 옮겨 가고 있습니다 아아, 몸이 달라지고 있는 봄입니다
늘 걷던 길이 햇빛 때문에 달라 보이는 시간, 봄볕에 발을 헛디딥니다 햇빛 때문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달라지다니요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만 더합니다 부디, 마음 때문에 몸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계간 『시안』 2011년 여름호 발표
조용미 시인 / 운구차
우리는 운구차를 타고 있다 운구차를 타고 간다 오래 갔다 운구차는 어딘가로 계속 가고 있다 검은 리본은 겸손하다
셀 수 없는 거리와 집들이 멀리 줄지어 지나갔다 우리는 운구차 안에 있다 창밖은 어둑해지고 우리의 얼굴은 검은 유리창 위로 여럿이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듣는 것, 느끼는 것, 숨 쉬는 것, 만지는 것이 모두 다 느리다
정지화면을 이어 놓았다 운구차는 같은 시간을 달린다 운구차는 낡았다 이제 아무것도 캄캄한 창으로 떠오르지 않고 운구차는 봄바람처럼 덜컹덜컹, 또렷하고 느리고 느리다
나 혼자다
계간 『POSITION』 2016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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