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은 시인 / 단지, 사과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굴러갔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단지, 사과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사과라는 말이 입 안에서 우주 밖으로 단숨에 굴러갔다.
사과에게 사과하기도 전에 사과나무 가지를 후려치는 폭풍우와 눈보라에 닿았다.
사막을 걸어가는 사과 장수처럼 사과의 처음에서 끝까지 완주한 적 없는데 사과 보다 먼저 사과의 일생에 다다랐다.
토마토가 되는 것은 어떻겠니? 토마토처럼 붉은 사과에 도달 하려고 겉과 속이 다른 껍질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과가 먼저 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과의 눈(目)이 먼저 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나먼 과수원에 쏟아지는 봄 햇살, 아직 싹 트지 않은 나를.
계간『철학과 현실』 2018년 봄호 발표
강영은 시인 / 무성무기양순파열음(無聲無氣兩脣破裂音)
너는 활시위를 당기는 입술소리, 부르르 살을 떨며 날아가 배고픈 과녁을 뚫기도 하지. 온종일 먹잇감 찾아 헤매는 네 속의 나는 따뜻한 밥, 아침이 올 때까지 캄캄한 아궁이 불을 지피지
너는 졸음에 겨운 부뚜막, 젖은 나무를 달구는 불의 표정을 달래지. 뜨거운 날숨 내뿜는 네 속의 나는 타는 잉걸불, 덧문이 열릴 때까지 식지 않는 체위에 골몰하지
너는 목젖에 닿은 두레박, 닿을 듯 말듯 부딪히는 물의 감정을 길어 올리지 낡고 오래된 네 속의 나는 투명한 물음, 달의 표정을 적실 때까지 축축이 젖은 맨몸으로 기어오르지
너는 말발굽을 달리는 먼 우레 소리,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대지 위를 달리지 콧김 내뿜는 네 속의 나는 말편자, 발도 아니면서 못 박힌 발을 대신해 말을 하지
그러니까 나는, 법적으로 말하면 네 발 아래 누운 여자가 되는 거지 ‘시작했으나 시작하지 않았고,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대지의 문법이 되는 거지 네 마음의 별리, 한적한 동굴에 암각 된 혀를, 흐느끼는 나를, ‘비읍’이라 읽지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해탈을 뜻함
계간『문파』 2018년 여름호 발표
강영은 시인 / 이상한 연못
잉어꼬리와 뱀의 네 발을 가진 흰 용이 지상으로 내려왔네. 뱀의 형상을 버린 몸뚱어리는 잉어가 되어 차가운 연못을 제 세상으로 삼았네. 비단 같은 비늘이 반짝일 때마다 진흙에 뿌리내린 물꽃이 버짐처럼 번졌네. 버드나무는 낭창낭창, 아첨거리는 속성으로 연못을 휘감았네. 연못 속 풍경이 휘어질 대로 휘어진 파장에 매혹 되었네.
미풍이 물결을 휘젓는 날이면 크고 아름다운 누각 아래 잉어 떼가 몰려들었네. “당신은 잉어 꼬리를 잡수어요, 저는 원숭이의 입술을 먹을게요.”* 뾰족한 입술들이 누각의 그림자를 나눠 먹었네. “오늘은 창포꽃 피는 좋은 날이지만, 다음 날이면 단풍 들어 시들고 만다오”** 예언자의 입술이 연못 주위를 떠돌았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연못 속에는 잉어의 꼬리들이 파닥였네. 파문을 싸고도는 은밀한 놀이, 수건돌리기 놀이가 성행했네.
암매(巖梅)가 피었네. 아래쪽에서 뻗어 올라간 큰 줄기가 눈이 먼 바위틈에 곁가지를 내었네. 본가지가 되고 싶은 곁가지는 한 번 더 방향을 꺾어 못가를 희롱 했네. 향기를 매단 수간(樹幹)의 모양은 언뜻 보기에 삼절(三絶)의 구도 같았지만 그것은 잉어가 흐려놓은 연못의 구도, 물고기를 잡아 목숨을 연명하는 어부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연못의 풍경 같아서 어부는 화살을 들어 잉어의 눈을 쏘았네.
잉어는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로 올라갔네. 어둠을 관장하는 검은 용을 애타게 불렀지만 햇살 퍼지는 구름 너머엔 어둠이 없었네. 흰 용은 하느님에게 읍소했네. “너는 그때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었느냐” 하느님이 물었네. “저는 그때 찬 연못에서 물고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흰 용이 대답했네. “연못에 있는 물고기는 사람들이 잡으라고 있는 것이니 그 어부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고 오히려 너에게 잘못이 있느니라” 흰 용이 옷을 갈아입은 기록은 여기가 끝이지만
비서秘書)를 기록한 오자서는 왕에게 묻네. “지금 모든 것을 버리시고 미천한 백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겠습니까?” 왕은 마시지 않았다고 하네***
파문과 추문이 끊이지 않는 색향(色鄕)처럼 흰 비단자락 스치는 소리, 물결이 물결을 밟고 가는 소리, 의문이 꼬리를 낳는 세상이 연못 속 풍경과 다름없으니 세상을 경계한 유령(幽靈)들에게 수초(水草)의 세상을 묻네.
색향 대제에 가는 일과 미천한 백성과 술 마시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가,
*이하의 대제곡[大堤曲]중의 구절 郎食鯉魚尾 妾食猩猩脣에서 **이하의 대제곡[大堤曲]중의 구절 明朝楓樹老에서 ***《사기(史記)〈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오는 백룡어복(白龍魚服)에서
시집 『상냥한 시론』(황금알, 2018)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용미 시인 / 흰색, 침묵 외 3편 (0) | 2019.09.19 |
|---|---|
| 김바다 시인 / 베이비, 달에 쓰여질 시 외 1편 (0) | 2019.09.19 |
| 함기석 시인 / 정물 연인 (0) | 2019.09.19 |
| 김중일 시인 / 해바라기 전쟁 외 1편 (0) | 2019.09.18 |
| 나희덕 시인 / 마른 물고기처럼 (0) | 2019.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