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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시인 / 해바라기 전쟁
구형 턴테이블 위에 낡은 LP버전의 지구를 올려놓고 모래바람의 목쉰 노래를 듣는 밤입니다. 보내주신 계절들은 잘 받고 있습니다. 항상 부족한 계절만큼 우리는 또 한 무리의 어린 병사들을 잃어야 합니다.
한번도 울어본 적 없다는 신의 동공같이 까맣고 건조한 대사막의 밤은 아름답습니다. 별들을 무수히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백전노장, 불멸의 전장영웅 밤과 하늘은 나란히 선봉에서 지금도 우리를 지휘하는 중입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어린 병사들의 계급장으로 쌓은 계단을, 끝없이 밟고 구름 위로 오르는 야간행군은 얼마나 고되고 가혹한 훈련인지요.
배신자들. 오래전 우리는 해바라기를 되찾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시간의 해방군으로부터 마을이 점령당하고 해바라기들은 모두 흩어졌지요. 우리는 더듬이가 잘려나간 귀뚜라미처럼 숨어서 울어야 했습니다.
마음의 한 가지 얼굴. 미친 해바라기들. 고작 하나의 마음일 뿐인 그것들은 변변한 몸 없이도 우리를 떠나 행복할까요. 오늘도 나는 대사막 한가운데에서 얼굴 없는 해바라기들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턴테이블 위에서 아직도 노래는 계속됩니다. 해바라기의 목쉰 노래를 따라 나는 턴테이블 위를 둥글게둥글게 돌고 또 도는 야간행군을 하는 중입니다. 먼저 간 병사들의 시체가 내 그림자 대신 발목에 매달려 질질 끌리는 밤입니다.
당신은 안전하십니까?
나는 마리오네뜨처럼 유쾌하고 분주하고 심각합니다. 검고 질긴 비가 내 손목을 휘감아 들어올립니다. 지금은 비의 리듬을 따라, 슬퍼하지 않고 우는 법, 기뻐하지 않고 웃는 법을 연습중입니다.
시집 『국경꽃집』(창비, 2007) 중에서
김중일 시인 / 모래시계
삼억년마다 한번씩 있는 회식자리에서 간만에 만취한 한 연구원이 주정처럼 툭 던진 말이 있었다. “이보게 K군. 은하는, 적어도 저 태양계만은 모래시계의 구조로 되어 있네”
Report of K
위의 가설로 기인한 제품개발연구가 시작된 지 어느덧 50억년. 둥근 달은 파울성 타구로 공중에 비스듬히 떠 있고, 지구로 파견된 SMLC의 영업사원인 나는 오늘도 눅눅한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다. 피로한 발목이 솜이불 같은 아스팔트 속으로 푹푹 빠져든다. 제품의 홍보를 위해 제품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영업의 기본. 먼 우주 저편 ‘연구소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래시계를 한번 뒤집자 3월, 눈발과 황사가 번갈아가며 날린다. 땅밑에서 붉은 침전물 상태로 가라앉아 있던 꽃잎들이, 하늘거리며 피었다가 일제히 모래바람으로 부서지며, 둥근 달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천길 나락 같은 달빛 속으로 조금씩 봄밤의 구조물들이 검은 사막의 모래가 되어 허물어져내린다. 나의 의식도 꿈속에서부터 산산이 분해되어 흘러든다. 간혹 구름이 달을 가린다. 프로그램은 잠시 다운된다. 해결되지 않는 제품의 오작동들. 그러나 연구소의 복구시스템은 신뢰할 만해, 지구와 연결된 꿈속의 하드디스크엔 나의 모든 기억이 백업되어 있다.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폐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아침이면 나는 온몸에 잔뜩 들러붙어 서걱거리는 모래잠을 툭툭 털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곳 사람들은 태양이 빛을 뿜어낸다고 착각한다. 모래시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일 뿐인, 태양 따위가 저 찬란한 빛을 뿜어낼 수 있다고 믿다니. ‘제품설명서’에 따르면, 지난 밤 달로 흘러들어와 대낮의 지상에 재결합된 기억의 입자들이, 모조리 모래의 시간으로 환하게 화학분해되어, 도로 태양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것. 저녁, 또다시 50억년 동안이나 정전된 ‘연구소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Tip 어느날 밤 K는 당신에게 모래시계를 팔러 온다. 당신의 눈앞에서 그는 꽃대 같은 손목에 꺾어질 듯 매달린, 거대하고 투명한 손으로 모래시계를 한번 뒤집는다. 순간 당신의 의식은 모래바람으로 하얗게 부서지며 우우우 블랙홀 같은 시계의 구멍 속으로, 달빛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당신의 기억은 당신이 찾을 수 없는 폴더에 모조리 백업된다. 당신은 간혹 기억도 안 나는 그 기억 때문에 꿈속에서 일생의 울음을 다 울기도 한다. 깊은 최면의 잠에서 번쩍 눈을 뜨면, K는 온데간데없고, 그날부터 당신은 견뎌내야 한다. 모래기둥이 아주 조금씩 바람에 깎여나가듯,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날들을.
시집 『국경꽃집』(창비, 200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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