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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마른 물고기처럼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8.

나희덕 시인 / 마른 물고기처럼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늘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앉아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 『莊子』의「大宗師」에서 빌어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시집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중에서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및 同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창비, 1991)『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비, 1994)『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 1997), 『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1),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야생사과』(창비, 2009)와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산문집 『반통의 물』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며 〈시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