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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희 시인 / 이타적 언어
수면이 부풀어 오른다 늙은 고래가 신음을 토하며 솟아오른다 수평선이 흑백으로 갈라지는 순간이다 물보라 속에 뒤집힌 흰 가슴이 보인다 죽어가는 고래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격렬하게 등을 밀어 올려주는 밍크고래 한 무리, 마침내 수면 위에 검은 주둥이가 묘비처럼 세워진다 허공을 한 바퀴 회전 한 뒤 늙은 고래가 꼬리부터 어두운 수면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저 흐릿한 멸절(滅絶)의 눈빛, 수면에서 지워지는 슬픈 파편들 끊길 듯 울부짖는 고래들의 가느다란 울음은 죽은 자를 잊기 위한 또 다른 비문인가 수면이 희검게 희검게 출렁이는 TV화면 속에서 내래이터목소리가 거품처럼 피어오른다 스피커에서 심해의 정적이 새어나온다
주석희 시인 / 저녁으로부터 오는 순간 (epilepsy*)
그는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그는 보도블록 위에 뒤집혀 숨이 끊길 듯 경련하고 있다 마치 전기의자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저항하고 있다 그의 두 팔이 허공을 마구 휘저으며 지나치는 사람들 발목을 움켜잡고 있다 그의 입속에서 끓어 넘치는 거품을 수많은 눈빛이 지랄 맞게 쳐다보고 있다 그의 두 눈은 허옇게 뒤집혀 저녁으로부터 오는 순간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는 제 몸이 벗어 날 수 없는 천형의 형틀이라는 듯 보도블록 위를 빙빙 돌며 발작하고 있다 다시 신호등이 노랗게 시들었고 그는 어느 사이비교주의 방언처럼 몸을 웅크리며 가슴에 죽도록 구원의 기억을 끌어당기고 있다 교회 십자가 위에 알약 같은 반달이 한 동안 사경을 헤매던 그를 거짓말처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누명을 벗 듯 흰 꽃잎들이 떨어지고 있다
*간질
주석희 시인 / 우울의 출구 (serenade melancolique*)
그녀가 욕조 안에 피어있었다 피비린내나는 꽃은 이미 터져 버렸고 물 위에는 음모가 초침처럼 불안하게 떠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나가면 그녀는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는 듯 창문을 닫고 다시 커튼 무늬에 몰입 했다 냉장실 검은 비닐 속에서 당근뿌리가 웃자라는 동안 세탁기속 옷가지들은 쥐어짜진 채 말라붙었고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를 달콤하게 음미했다 최근 블랙커피 몇 잔이 그녀의 식사였는데 그 때문인지 그녀의 입술은 커피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지난해 오른쪽 젖가슴을 싹둑 잘라 냈다 봄이 오면 다시 피어 날 것을 염려해 방사선인두로 새카맣게 지져냈다 (전봇대를 붙잡고 구토를 했어 뒤틀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거실바닥에 나뒹굴었지 고통은 바다처럼 막막했고 남은 젖가슴은 한 점 무인도였어 절벽으로 급 하강하는 의식을 붙잡고 안간힘을 썼는데 눈을 떠 보니 아직도 화끈거리는 수술자국에 잘린 손톱이 박혀 있었어)
그녀는 비누거품 대신 우울을 풀어놓고 눈물로 샤워를 했을까 불면에 시달리며 수 만 가지 생각을 끌고 들어가 어둠속에 갇혀 버린 그 날 (오른손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이 자해를 했어 이 일만큼은 아직 통제 불능인 왼손이 해주었음 해) 오른쪽 손목에 시리게 칼날이 지나가고...... 비로소 우울한 세레나데를 확인 했을까
팔목에서 검은 그을음이 실바람처럼 풀려나가는 동안 시계초침 소리는 빈 커피 잔 속에 맴돌고 있었고 그녀를 통과해 버린 텅 빈 방안의 시간이 눈앞이 캄캄하도록 흐르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
주석희 시인 / 죽음이 날아가는 속도
오목눈이 새가 날아오르다 툭, 놓쳐버린 그늘이 있었다 그늘 속에 추락한 새가 파닥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나뭇가지사이를 다급하게 뛰어다니던 오목눈이의 악몽 위를 검은 바퀴가 새털보다 가볍게 지나가고 있었다 벚나무 그늘 아래 말끔히 터져 버린 새의 마지막 기억 오목눈이 새가 날아오르다 툭, 놓쳐버린 새의 눈빛이 종일 죽음이 날아가는 속도를 견뎌내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 오목눈이의 사랑을 벚나무가 제 꽃잎을 쓸어내는 연못같이 흔들리는 그늘을 앞바퀴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석희 시인 / 말발굽소리
개화산역을 통과하는 회전출구 그녀가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도심 속으로 출근하는 그녀는 꽃무늬스카프를 매고 말총머리 휘날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역사 창틈으로 파고드는 햇빛 끼-익, 지하철고삐 휘어잡는 소리 그녀가 창가에서 휴대폰을 움켜쥐고 오늘의 비밀 패턴을 그린다 무거운 투구대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띵동” “카톡” 급히 신호를 받는다 환승역 안내방송이 채찍처럼 울리고 그녀는 결의에 찬 호흡으로 전동차에서 뛰쳐나와 사무실 의자까지 두두 두두두 달려간다 허벅지가 터질 듯 한 스키니진과 검은 부츠를 신은 그녀가 땅, 전자파발을 띄운다 컴퓨터 좌판 위에 광속으로 달려온 시간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난다 개화산역에 다시 어둠이 내리고 그녀가 계단 그림자만큼 닳아버린 구두를 질질 끌고 역사를 빠져 나온다 바람에 벚꽃잎이 날리 듯 그녀의 말발굽소리가 횡단보도 빗금 속으로 사라진다
2013 《포엠포엠》 가을호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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